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2.17 19:42 수정 : 2019.12.18 14:23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 탄핵은 우크라이나 둔 미-러 각축 산물
미-러, 우크라이나 핵무기 제거 뒤 각축 시작
'나토 동진 불허' 약속 휴지조각 되며 재점화
러, 나토 확장에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응수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탄핵 과정을 밟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적인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관련된 사안을 수사하라고 우크라이나 정부에 압력을 넣으며 군사원조를 지렛대로 썼다는 의혹이다. 내정을 외교에 연루시킨 트럼프의 권력남용 혐의가 짙지만, 긴 호흡으로 되돌아보면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논란은 냉전 종식 이후 미-러 관계 및 국제질서가 빚어낸 부산물이다.

냉전과 함께 종식됐다가 생각됐던 열강들의 지정학적 경쟁은 우크라이나에서 다시 발화됐다. 우크라이나를 둔 미국과 러시아의 각축은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에 이어 급기야 우크라이나 스캔들까지 빚어내게 됐다.

그 시작은 30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시작된 동구권과 소련의 해체였다. 베를린장벽 붕괴 뒤 미국과 당시 서독은 독일 통일에 대한 소련의 동의가 필요했다. 통일 독일이나 서방이 과거처럼 러시아를 위협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소련이 동독에 주둔한 군을 철수하는 등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90년 1월31일 한스디트리히 겐셔 당시 서독 외무장관은 통일 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영역이 동쪽으로 확장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는 2월10일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의 회담에서 “당연히 나토는 동독의 현재 영토로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없다”고 보장했다. 통일된 독일에서도 동독 지역에는 미군 등 나토 병력이 주둔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나토의 동진, 즉 서방의 영향권이 동구권 등 소련의 영향권으로 확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일 통일을 소련이 동의한 것이다. 당시 동독에 주재하던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젊은 중견 요원이 이 과정을 상세히 지켜봤다.

동구 사회주의권이 해체되자, 고르바초프와 보리스 옐친 러시아 신임 대통령은 소련의 15개 공화국을 느슨한 연방 형태로 유지하려 했다. 관건은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크고, 같은 슬라브계인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기원인 키예프공국이 성립된 곳이다. 우크라이나에 속한 크림반도는 서기 10세기 키예프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동방기독교인 정교회의 세례를 받고 슬라브 문명을 발원한 곳이기도 하다. 러시아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의 일부였다. 또 소련을 부흥시킨 후방 산업 지대가 있었고, 소련의 핵무기 등 군사력이 배치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심장이었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도 소련 연방의 존속을 지지했다. 소련 연방이 붕괴돼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소련 핵무기가 유출되는 등의 혼란이 벌어지는 것은 악몽이었기 때문이다. 부시는 1991년 8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의회에서 “자유는 독립과 같은 것이 아니다”라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반대하는 연설까지 했다. 하지만 이는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독립 의사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그해 말 소련에서 군부쿠데타가 실패하자, 우크라이나는 주민투표를 통해 90% 이상의 찬성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러시아계 주민이 다수인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서도 찬성이 높았다.

그러자 옐친도 러시아 독립을 선포하며 소련 연방 해체를 선도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배치됐던 1900개의 핵탄두와 2500개의 전술핵무기는 미국이 주도하려는 냉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질서에는 중대한 위협이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소련 핵무기를 러시아로 반환하는 데 손을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1994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50개국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정지원과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핵무기를 반환하는 ‘부다페스트 의정서’가 합의됐다.

문제는 이 의정서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안보보장을 구속력있게 ‘보증’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약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가 붕괴된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압력 앞에서 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우크라이나의 핵무기가 반환되게 되자 미국의 생각이 달라졌다. 이미 미국에서는 나토를 확장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터였다.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은 부다페스트 회의 직전인 11월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의 반대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토를 동·중부 유럽으로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부다페스트 회의에서 옐친은 미국이 냉전을 ‘차가운 평화’로 바꾸려 한다며 미국의 나토 확장 계획을 공격했다.

1999년 12월31일 옐친은 갑자기 사임을 발표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게 권력을 넘겼다. 미-러 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갔다. 푸틴은 옐친처럼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독일 통일의 조건이던 나토 동진 불허가 휴지 조각이 되는 현실에서 소련의 영향권 회복은 러시아의 생존에 필수라고 생각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체첸 내전에 단호히 대응하며 러시아 국민의 과거 향수를 달래줬다. 푸틴의 집권 이후 석유 등 원자재 가격이 회복되면서, 최대 산유국 러시아의 경제도 호전됐다. 서방에 대한 푸틴의 도전 의지는 커졌다. 2000년대 이후 유럽연합이 동구권으로 확대됐고, 나토도 그 뒤를 따랐다.

2004년 3월이 분기점이었다. 나토는 소련 공화국이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발트 3국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앞까지 나토가 동진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5월에는 유럽연합이 발트 3국을 더해 체코·헝가리·폴란드·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11월이 되자,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는 오렌지혁명이 일어나 친러시아 정부가 붕괴되고, 친서방파인 빅토르 유셴코가 대통령이 됐다. 조지아와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친러 정부가 붕괴되는 색깔 혁명이 이어졌다.

푸틴의 러시아는 이런 사태를 서방이 개입해 자신들의 목을 조르려는 급박한 안보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위기의식은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는 말에서 드러난다. 미국도 2008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 절차를 개시하려 했다. 그해 8월에 러시아는 결국 조지아를 침공하는 행동에 나섰다. 친러 남오세티야 분리주의 세력 지원이 명목이었으나, 자신을 포위하는 서방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2009년 새로 들어선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미-러 리셋’ 정책을 표방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표방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푸틴의 대리인으로 미국과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을 체결하는 등 미-러 관계는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푸틴은 2012년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해, 러시아의 영향권 회복을 다시 추진하는데, 유럽연합도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절차를 재개했다. 푸틴은 친러 성향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어 유럽연합 가입을 연기시켰다. 2013년 말 키예프에서 반정부 시위가 터졌고, 이는 2014년 초 야누코비치가 실각하는 마이단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개입을 드러내는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차관보의 전화 통화가 폭로됐다.

푸틴은 즉각 냉전 이후 최고강도의 군사개입에 나섰다.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 동부 러시아계 지역의 분리독립 전쟁을 ‘발주’시켰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내전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이 중재해 2014년 9월과 2015년 2월 대화와 휴전을 위한 민스크협정이 맺어졌으나, 내전은 계속돼 1만3천명이 사망했다.

러시아는 시리아 내전에도 개입하며 중동으로도 영향권 회복에 나섰다. 사이버전쟁도 감행했다. 2016년 미국 대선 운동에서 러시아는 대러 강경파인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 진영 운동을 교란하는 해킹과 사이버 선전전을 펼쳤다.

우크라이나는 미-러 사이에 낀 약한 고리였다. 전세계의 브로커와 로비스트의 집결지가 됐다. 2010년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이 될 때는 미국 로비스트이자 선거전략가인 폴 매너포트가 기용돼 활약했다. 매너포트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의 선거운동 지휘봉을 잡았다. 대선 와중에서 매너포트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폭로가 터졌고, 이는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스캔들로 이어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에 <폴리티코>는 우크라이나가 트럼프의 고위보좌관 부패 연루를 폭로하는 등 미 대선에 개입했다고 보도했다. 민주당 선대본부장 존 포데스타가 야누코비치와 함께 작업했다는 사실도 전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 대선 후보 양쪽에 다리를 걸치며, 미-러 사이에 낀 자신의 운명을 모색한 정황이 역력하다.

이 때문에 트럼프는 러시아가 자신을 위해 미국 선거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힐러리 클린턴을 위해 선거에 개입했다고 믿었다. 지난 5월 새로 선출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가스 회사 부리스마의 고문으로 일한 조 바이든의 아들 헌터를 수사하라고 압박한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나오게 된 배경도, 우크라이나가 바이든의 약점을 쥐고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헌터 역시 우크라이나에 꼬여 든 로비스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정치권 전체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스캔들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지난 9일 파리에서 푸틴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중재하는 2+2 정상회담에서 다시 내전 종식을 위한 휴전에 합의했다. 하지만,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영향권 이탈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으로서도, 자국 대통령의 탄핵까지 부른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러시아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도 분명하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