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03 22:01
수정 : 2005.01.03 22:01
‘전후를 청산하라’
일본 우파가 2차대전 패전 60년을 맞은 올해 첫날부터 내건 도발적 기치다.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제 군국주의가 아니라 패전 뒤 일본이 걸어온 평화와 민주주의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요미우리신문>은 1일 사설을 통해 ‘탈전후’의 국가전략 수립을 주문하면서 일본 평화세력에 대해 ‘수구’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 신문은 아직도 일본에는 전후 세계의 실상과 동떨어진 일국평화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국심이라면 반사적으로 군국주의 부활을 떠올리며 소란을 떠는 수구세력이 존재한다며 “수구의 사고는 연합군사령부의 교묘한 언론통제·조작으로 배양된 전후민주주의의 잔재”라고 비난했다.
<산케이신문>은 올해를 “전후의 진보주의 사고, 무방비 평화론, 전전 역사의 전면부정 등의 ‘잘못된 전후’를 넘어서는 도전의 해”로 규정했다. 이 신문은 일본의 진보세력이 주변국과 연대해 대항하고 있지만 1990년대부터 시작된 보수화의 흐름을 거스를 정도는 아니라며, 자위대 해외진출의 길을 튼 각종 법률과 국기국가법·대북경제제재법의 성립을 진보세력 퇴조의 증거로 제시했다. 신문은 진보세력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평화헌법의 개정은 ‘전후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설은 전후의 진보적 흐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우파의 공세가 올해 파상적으로 전개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최대의 전장은 평화헌법 개정이다. 중·참의원 헌법조사회는 4월 개헌 시안을 발표할 예정이며, 올해 창당 50년을 맞는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도 개헌안을 내놓을 계획이다.
일본의 전반적 우경화로 수세에 몰린 중도·진보세력은 전후 60년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을 촉구하며 ‘호헌 방어막’을 치고 있지만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도쿄신문>은 60년이나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무기수출·핵무기제조를 하지 않은 일본의 길은 국제적으로 큰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며, 일본이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팍스 야포니카’야말로 일본에 어울리는 진로라고 지적했다.
두번째 전장은 역사다. 올해 중학교 역사교과서 채택은 왜곡 교과서가 교육 현장에 뿌리내릴 것인지, 영원히 추방될 것인지를 가름하는 마지막 일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60돌의 열기가 고조될 8월 이 싸움은 절정으로 치달을 것이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언급한 것처럼, 민감한 올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거대한 후폭풍을 몰고올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마지막 대결장은 대북 제재다. 1년8개월의 교착 끝에 2차 정상회담을 계기로 어렵사리 궤도에 오를 것처럼 보이던 북-일 관계는 ‘가짜유골 파동’으로 다시 탈선으로 내달리고 있다. ‘제재는 곧 선전포고’라는 북한의 엄포가 현실화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대북 제재가 양쪽의 대화를 상당기간 얼어붙게 할 것임은 명백하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100년, 해방 60년, 한-일협정 40년이 겹친 올해 개헌·역사·제재라는 세 단어의 무게에 짓눌려 한-일의 교류·우정이 질식될지도 모른다. 새해를 여는 마음이 무거운 것은 이 때문이다.
박중언 도쿄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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