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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23 21:04 수정 : 2005.01.23 21:04

▷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다룬 방송 프로그램 축소보도와 관련한 정치인의 개입 의혹을 둘러싸고 <아사히신문>과 ‘진실게임’을 벌이고 있는 일본 <엔에이치케이방송>이 23일 당사자인 아베 신조(왼쪽) 자민당 간사장 대리와 나카가와 쇼이치 경제산업상이 <아사히>에 반박 통지서를 보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내보낸 사진.

관련자들 말바꿔 ‘실체’ 안갯속
거짓 드러나는쪽 신뢰 치명상

세계 최대 방송사인 영국 <비비시>에 버금가는 일본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 일본 사회의 여론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아사히신문>. 두 ‘골리앗’이 배수진을 치고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걸려 있고, 유력 우파 정치인들도 깊숙이 개입돼 있다. 엔에이치케이는 ‘아사히의 허위 보도’라는 제목의 기사를 잇따라 내보내면서 아사히에 사죄를 요구하는 공문과 공개질의서를 보냈고, 아사히는 엔에이치케이가 공공의 전파를 사유화해 일방적으로 자사를 중상·비방하고 있다며 법적 대응에 나설 뜻을 밝혔다.

아사히, 의혹 최초보도 → NHK “허위사실” 반박 → 아사히, 취재과정 공개 → NHK, 뉴스 통해 반격 → 아사히 “법적대응 검토”

경위=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엔에이치케이 특집프로그램에 대한 외압 시비가 발단이다. 아사히는 지난 12일 ‘여성국제전범법정’을 소재로 삼은 이 프로그램 수석 프로듀서의 내부고발과 관련자들에 대한 취재를 토대로, 외압 때문에 일본군대 위안부 문제와 히로히토 전 일본국왕의 전범 사실을 다룬 프로그램 내용이 대폭 수정됐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방영 전날 엔에이치케이 간부들을 불러 프로그램 내용을 문제삼은 자민당 우파 실력자인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대리와 나카가와 쇼이치 경제산업상을 외압의 당사자로 지목했다.

아사히 보도 다음날 내부고발을 한 프로듀서가 4년 동안의 가슴앓이 끝에 ‘눈물의 공개증언’에 나서는 등 파문이 급속히 확산되자 우파 정치인들과 엔에이치케이는 왜곡 보도라며 반격에 나섰다. 아베 간사장 대리는 “할 말을 했을 뿐, 외압은 아니다”고 주장했고, 나카가와 경산상은 아사히의 취재 때는 “기억이 모호한 상태였다”며 방영 전에 엔에이치케이 간부들을 만난 사실 자체가 없다고 말을 바꿨다.

이에 대해 아사히는 18일 한면을 할애해 취재 과정에서 오간 말들을 자세히 싣고 보도에 전혀 이상이 없다고 반박한 반면, 이튿날 엔에이치케이는 취재에 응했던 마쓰오 다케시 당시 방송총국장을 등장시켜 보도내용을 정면으로 재반박했다. 마쓰오 전 국장은 자신의 얘기와는 정반대로 “우파 실력자의 발언을 엄청난 압력으로 느꼈다”고 말한 것으로 아사히가 보도했다고 비난했다. 이 방송의 내부고발창구인 법령준수위원회도 당시 압력은 없었다는 공식 조사결과를 이날 발표했다. 엔에이치케이는 이어 자사 뉴스망을 통해 아사히 보도가 거짓이라고 공세를 퍼부었다.


아사히는 보도기관의 책임자였던 사람이 어떻게 취재 때 한 얘기를 뒤집을 수 있느냐고 비판하는 한편, 엔에이치케이가 전파를 사유화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양쪽의 공방이 가열되면서 각종 내부비리로 그동안 사퇴 압력을 받아온 에비사와 가쓰지 엔에이치케이 회장은 예정을 앞당겨 25일 사임 의사를 표명할 것으로 전해졌다.

파장과 본질=애초에는 전형적인 정치권 외압 시비처럼 우파 실력자들의 발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공방 수준으로 비친 싸움이 엔에이치케이 쪽이 아사히의 취재 내용 자체가 거짓이라고 주장하면서 ‘진실게임’으로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느 쪽의 주장이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되면 신뢰성에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됐다.

지금으로선 아사히 기자들이 엔에이치케이 간부를 취재할 때 대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있는지가 관건이다. 테이프가 존재한다면 사실관계 확인은 간단하다.

그렇지만 양쪽의 ‘취재내용 공방’에 가려져 이번 사태의 본질이 흐려질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엔에이치케이 간부들이 우파 실력자들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말했는지도 중요하지만 ‘공영방송과 정치의 관계’가 훨씬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더욱이 엔에이치케이가 프로그램과 관련해 사전에 우파 실력자들을 만났고, 이후 내용을 대폭 수정하는 등 외압의 정황도 충분히 드러난 상태다. 핫토리 다카아키 릿쿄대 교수(미디어법)는 “공영방송이 방영되지 않은 프로그램에 대해 정치인에게 설명하는 행위를 통상적 관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외압 불감증’을 지적했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역사·대북문제등 강경우파 핵심

‘외압 주범’ 지목된 아베 자민당 간사장 대리

일본에서 ‘가장 위험한 정치인’으로 아베 신조(51) 자민당 간사장 대리를 꼽을 수 있다. 정부와 자민당의 요직을 두루 역임해온 강경 우파의 핵심 아베는 차기 총리로 가장 유망해 주변국과 일본내 양심세력을 긴장하게 한다.

역사·개헌·대북제재 등 일본의 주요 현안에서 아베의 이름이 빠지는 일은 보기 드물다. <엔에이치케이>와 <아사히>의 외압 공방이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 것도 아베가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납치 문제가 터져나온 뒤 대북 강경발언 하나로 국민적 인기를 누려온 아베로선 외압의 주범으로 인식되면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논란이 된 프로그램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이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의 핵심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런 면에서 올해 본격적으로 전개될 왜곡 역사교과서의 일선 학교 채택을 둘러싼 ‘전쟁’이 이번 사태의 돌출로 앞당겨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베는 2001년 당시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모임’ 사무국장으로, 회장이던 나카가와 쇼이치 경산상과 함께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교과서의 기술을 삭제하는 데 앞장섰다. 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펴낸 왜곡 교과서의 검정과 채택을 지원했다. 그러나 주변국과 일본 시민단체·언론의 대대적인 반대운동에 부닥쳐 채택에 실패하자 조직적 지원을 다짐하고 나섰다. 아베는 지난해 6월 자민당 지방의원 모임에서 왜곡 교과서의 채택을 위해 적극 나설 것을 강도높게 촉구한 바 있다. 그는 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서도 “후임 총리도 참배해야 한다”며 옹호했다.

아베는 자민당 납치문제대책본부를 이끌며 대북 경제제재 여론을 선도하고 있다. 특히 그는 경제제재를 통한 북한의 체제붕괴를 공개적으로 외치고 북한 인권법 제정을 주도하는 등 미국 신보수와 ‘철벽 공조’를 이루고 있다.

아베는 이념적으론 물론 태생적으로도 강경 우파다.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에이(A)급 전범이면서도 총리를 지낸 대표적 강경파다.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대신을 지낸 기시는 1953년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평화헌법 개정에 앞장섰고, 57년 총리가 된 뒤 미-일 안보조약 체결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2차대전 이후 일본 보수우파 주류를 만들어낸 인물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외상을 지냈으며, 유력한 총리 물망에 올랐으나 암으로 숨졌다. 외상시절의 아버지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전형적인 세습 정치인인 아베의 행태에서 기시가 주장하던 군국주의의 그림자를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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