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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16 09:09 수정 : 2019.03.16 09:34

〔토요판〕 커버스토리
한국 양심수의 일본 친구들-‘재일 구원회’

‘한국 양심수 지원 모임’ 43년째 활동
유학·사업차 고국 가서 간첩 조작된
재일 한국인 이웃 구명 위해 시작
당시 한국 민주화운동은 피해자 외면

단식과 서명, 국제인권기구 등에
“양심수 사형집행 막아달라” 청원
일본 의원 두차례 서명도 끌어내
재일 양심수 전원 생환에 큰 역할

“지원운동 하면서 세상에 눈떠
한국 사회 많은 문제 일본 지배 탓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미안해”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질 때마다 유학생 등 재일동포들을 붙잡아 고문을 가해 간첩으로 조작했다.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고국으로 공부나 사업을 하러 건너온 150여명의 재일동포들이 졸지에 사형수 등 중범죄자가 됐다. 하루아침에 정권의 희생양이 됐지만, 한국의 민주화세력은 간첩사건이라는 명칭 때문에 자신들에게도 위험이 닥칠까봐 이들을 외면했다. 그때 고립된 이들을 구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 지식인과 시민들이다. 이들은 구원모임을 만들어 서명운동과 대중집회, 국제기구 호소 등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덕분에 모든 재일동포 양심수들이 감형·석방돼 일본으로 돌아갔다. 애초 목적을 이룬 뒤에도 이들의 운동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동지이자 친구들의 얘기다.

“구원운동을 하면서 오히려 우리가 많이 배웠다.” 40여년 동안 재일동포 양심수들을 도와온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의 와타나베 가즈오 대표(왼쪽)와 이시이 히로시 사무국장이 지난 6일 저녁 ‘도쿄 볼런티어 시민활동센터’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함께 서 있다. 도쿄/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재일 한국인 양심수의 오랜 벗을 찾아가는 길은 멀었다. 지난 6일 일본 도쿄 중심부에서 지하철과 전철을 몇차례 갈아탄 뒤에야 도쿄 남서쪽에 있는 오타구 이케가미역에 닿았다.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5분 정도 달리자, 좁은 도로 저쪽에 건축공사 현장이 나타났다. 공사장 앞에는 안전관리원이 빨간 경광봉을 들고 차량과 행인의 안전한 통행을 안내하고 있었다. 멀리서도 그의 희고 굵은 눈썹이 낯익었다.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이하 전국회의) 사무국장인 이시이 히로시(69)다. 5층짜리 건물 공사장의 안전관리원으로 일하는 그의 업무 시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조금 힘들지만 아직은 할 만하다. 하고픈 일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 시간 날 때 열심히 벌어놓아야 한다.”

그가 ‘하고픈 일’은 한국에 가거나 일본에서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은퇴한 그는 몇년 전부터 후생연금(국민연금)을 받고 있지만, 아내와 생활비로 쓰기에도 빠듯하다. 여비 등 ‘한국 자금’은 따로 벌어야 한다. 일하는 시간에 따라 받는 봉급이 다르지만, 지난달에는 일한 날이 많아서 23만엔(약 230만원)을 벌었다. 지금까지 150차례 이상 한국을 드나든 자금의 원천이다.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 사무국장인 이시이 히로시가 지난 6일 오후 도쿄 오타구 이케가미역 부근의 한 건설현장에서 안전관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막노동으로 번 돈으로 한국에서 열리는 재일 정치범 재심 재판정에 참석한다. 도쿄/김종철 선임기자
매달 한번씩 한국 양심수 위해 서명운동

비슷한 시각 도쿄 북동쪽으로 한시간쯤 떨어진 지바현 마쓰도. 이시이의 오랜 동지이자 친구인 와타나베 가즈오(77)가 자신의 작은 농장에서 봄농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집 근처의 약 200평짜리 밭에 브로콜리·감자 등 각종 채소를 심기 위한 이랑을 만들고, 거름을 냈다. 전국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와타나베가 특별한 일이 없을 때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돈 벌려고 농사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33년간 교사로 일했기에 연금만으로도 혼자 살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최근 한국에 자주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가득 찼던 연금 금고가 텅 비긴 했다.(웃음)” 와타나베는 몇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마쓰도에서 혼자 산다.

두 사람은 이날 저녁 도쿄 도심인 이다바시역 인근의 도쿄볼런티어시민활동센터에서 만났다. 대여섯개의 탁자가 놓인 볼런티어센터는 도쿄도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시민단체나 개인 등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2년 전 ‘2020 올림픽’을 앞둔 도쿄도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전국회의가 세들었던 낡은 건물을 철거하는 바람에 사무실이 없어졌다. 가난한 시민단체에게 볼런티어센터는 소중한 보금자리다.

와타나베와 이시이는 이날 전국회의 회원인 기타하라 레이코(66)와 함께 전국회의 활동을 점검했다. 전국회의가 최근 주최하거나 참여한 큰 행사만 3건이다. 일본의 여러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3·1절 100주년 기념행사 두 곳(2월24일 분쿄구민회관, 3월1일 저녁 신주쿠 알타 빌딩 앞 촛불집회)에 회원들과 함께 참석했었다. 과거의 가해 역사를 직시하자는 게 주제였다.

“신주쿠에서 열린 집회에서 3·1 독립운동은 조선을 위해서뿐 아니라 길을 잘못 든 일본도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연설을 듣고 500여명의 참석자들이 숙연해했다. 그런데 그날 행사장 옆에는 한국과의 국교 단절을 외치는 우익들이 마이크로 떠들면서 방해했다. 무시하고 행사를 진행했지만, 우리가 할 일이 예전보다 더 많다는 것을 느꼈다.”(이시이)

전국회의는 지난달 26일 저녁 퇴근 무렵 도쿄 우에노역 앞에서도 자체 홍보활동을 벌였다. 회원 대여섯명이 한국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청원서에 서명을 받았다. 수십년째 계속하고 있는 월례행사다. 이렇게 모은 서명과 청원서를 매년 연말 청와대에 보낸다.

“예전에는 우리가 유인물을 나눠주면 시민들의 반응이 좋았지만, 사회가 변해서 요즘은 호응도가 낮다. 그래도 이런 일을 계속하는 게 의미가 있다. 우리 활동이 한국 양심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정부를 규탄하고 항의하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반응을 봐라.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서 한반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줘서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 정부가 반성과 사과를 하고 배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아베 정부는 외면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와타나베)

재일동포 조작간첩사건의 고 최철교씨에 대한 재심(지난 1월17일)에서 무죄가 선고된 직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그의 딸 최종숙(앞줄 오른쪽 둘째)씨와 구원활동을 해왔던 일본 시민, 재일동포 양심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아랫줄은 왼쪽부터 강종헌(양심수), 황영치(최종숙씨 남편), 최종숙, 이철(양심수)씨다. 뒷줄은 왼쪽부터 와타나베 가즈오(구원회), 고치 도루(구원회), 강종건(양심수), 이시이 히로시(구원회), 가토 다카시(구원회)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는 1976년에 결성된 ‘재일 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전국회의’를 계승했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으로 몰렸던 서승·서준식 형제 사건이 일어난(1971년 4월) 뒤 일본에서는 서씨 형제를 돕기 위한 첫 구원모임이 만들어졌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강화되던 1974~75년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간첩조작 사건이 대폭 늘어나면서 이들을 구하기 위한 구원모임도 각각 결성됐다. 당시 한국의 민주화운동 단체나 인사들은 공안당국이 뒤집어씌운 간첩사건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에 겁을 먹고 이들을 돕기보다 피하는 분위기였다. 개별 구원회 활동과 별도로 일본 정부 등 당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전국 조직인 ‘재일 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전국회의’가 출범했다.

클럽 보이 하다가 구원활동 동참

와타나베와 이시이가 재일 한국인 양심수 구원활동에 나선 것은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다. 와타나베는 1960년 대학(호세이대 일본문학과)에 들어간 뒤 당시 ‘4·19를 배우자’는 분위기 속에서 학생 동아리에서 한국 역사를 배웠다. “그때 일본이 ‘위안부’와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엄청 놀랐”지만, 대학 졸업 후 법률회사를 거쳐 마쓰도 제4중학교 국어교사로 일하면서 한국과 별 관계 없이 지냈다.

평범한 교사 와타나베가 재일 한국인 양심수의 친구가 된 것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쓰도에서 파친코 사업 등을 하던 최철교(2013년 작고)가 1974년 4월 고향(경북 청도)을 방문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김포공항에서 군 보안사령부 수사관들에게 끌려가서 고문받고 간첩 혐의로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을 때였다. 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됐지만, 그를 잘 아는 동네 이웃들과 최철교의 딸(종숙)이 다니던 마바시중학교 학부모들이 나서 구원모임(‘최철교 구원회’)을 만들었다. 이들은 최철교 구원회를 확대(1978년)하면서 마쓰도에서 신망이 높던 와타나베에게 합류를 요청했다. 그는 최철교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쾌히 수락했다. 와타나베는 그때부터 한국 양심수 살리기에 ‘올인’했다.

“1975년 4월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우리는 대단한 위기감을 느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 최철교, 강종헌씨 등을 박정희 정권이 진짜로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떡하든 이들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와타나베)

이시이는 1970년대 중반 이철(71) 구원활동으로 한국 양심수와 첫 인연을 맺었으나, 당시 이철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규슈 구마모토의 한 고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올라와서 아카사카에 있던 엘모로코라는 나이트클럽의 보이로 일하던 즈음으로 기억했다. “중학교 1년 선배한테 어느날 연락이 왔다. 이철이라는 자기 동급생 한국인이 서울로 유학(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갔다가 간첩 혐의로 구속됐다면서 구원활동을 같이 하자고 했다. 1975년 11·22사건(재일동포 유학생 17명을 간첩단으로 구속 기소)으로 구속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확정됐던 이철은 1988년 석방됐으며, 2015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대중씨가 납치당하는(1973년 8월) 등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박정희 정권한테 심한 일을 당하던 때여서 이철 선생도 독재정권의 희생양이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 선배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구원활동에 동참했다.”(이시이)

대학에 가지 않았던 이시이는 이철 구원회 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배워갔다. 그는 이철의 2심 재판(1976년) 때 처음 한국을 방문해 졸속으로 진행되는 재판을 지켜봤다. 그 뒤 이철이 북한을 방문했다는 시기에 도쿄에 있었던 사실을 도쿄변호사회가 밝혀냈을 때 조사 작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열성적인 시민활동가로 변해갔다. 한국 재판정에 응원하러 가는 구원회 동료들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직장과 거리에서 모금함을 돌리는가 하면, 이철의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수시로 오사카까지 달려갔다. 또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유럽으로 와인 공부(1979~81년)를 하러 갔을 때도 제네바의 유엔 인권위 본부, 런던의 앰네스티 본부 등을 찾아 이철 등 재일 한국인 양심수 석방운동을 했다.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난 뒤에는 국제인권기구 앞에서 광주학살 규탄 집회도 열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활동 보폭 넓혀
신일철주금 앞에서 징용배상 시위
일본계 한국기업 해고노동자 지원
‘위안부’ 수요시위에 참석하기도

한국행 여비와 운동자금 마련 위해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연금 쪼개

“위안부, 징용배상 외면 부끄러워
일본 사회 변화 위해 힘 보태고파
최근 한-일 관계 악화 걱정되지만
한-일 시민 연대로 이해 넓혀야”

1982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2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보관 자료

1981년 5월 재일 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전국회의가 양심수 석방을 위해 일본 정부가 나서달라고 외무성에 보낸 요청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보관 자료
‘재일 한국인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가 <아사히신문>(1982년 5월17일치)에 낸 전면광고. 도쿄/김종철 선임기자
일본의 구원회들은 재일 한국인 양심수들의 사형집행을 막고 석방시키기 위해 시민들을 상대로 한 서명운동을 비롯해 단식투쟁과 시위, 콘서트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와타나베는 여름방학 때면 아예 공무원노조의 차량을 빌려 지바현 일대를 돌면서 재일 한국인 양심수 구명운동 캠페인에 나섰다. 또 재일 한국인 양심수에 관한 다큐영화 <고발> 상영과 신문 전면광고(<아사히신문> 1982년 5월17일치)를 내는 등 홍보활동을 벌였으며, 우쓰노미야 도쿠마 의원(자민당) 등의 도움을 얻어 ‘재일 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국회의원 간담회’도 조직했다. 재일동포 양심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일본 국회의원들의 서명이 두차례 있었던 배경에는 이들 일본 시민활동가들이 있었다. 일본의 활발한 구원활동은 재일 한국인 양심수들의 감형 및 조기 석방을 끌어내는 데 큰 힘이 됐다.

“구원 활동으로 한국에 가면 재일동포 간첩사건에 왜 일본인인 당신들이 나서냐고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또 자이니치(재일 한국인)들도 ‘그들이 뭔가 잘못했으니 수사기관에서 잡아갔을 것이고 법원에서는 사형 등 중형을 선고하지 않았겠느냐’고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을 구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수 있었다.”(이시이)

“한국의 6월항쟁 등 민주화운동에 힘입은 바가 커지만, 1988년 말 강종헌씨가 가석방돼 돌아왔다. 전국회의로서는 첫 석방자의 귀환이었는데 그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 뒤 최철교, 이철씨도 돌아와서 그들의 얘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이런 날이 정말 오는구나 감동했다.”(와타나베)

도쿄볼런티어시민활동센터에서 지난 6일 저녁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 와타나베 가즈오 대표(가운데)와 회원 기타하라 레이코(오른쪽)가 회의를 하고 있다. 왼쪽은 한때 이들의 구원활동 대상 중 한 사람이었던 이철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회장. 도쿄/김종철 선임기자
해고노동자 일본 원정 투쟁의 동지

재일 한국인 양심수들이 모두 귀환하고,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가 여야 정권교체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감에 따라 개별 구원회는 생명과 인권을 구한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대부분 문을 닫았다. 전국회의도 해산하자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나 ‘재일 한국인 양심수 지원을 위한 전국회의’는 1999년 ‘한국 양심수 지원을 위한 전국회의’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재일 양심수들은 돌아왔지만, 완전 무죄가 아니라 특사 형식으로 석방됐기에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이뤄지지 못했다. 왜 재일 한국인 정치범들이 그렇게 많이(약 150명) 생겼는지를 생각해보면 원인을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국가보안법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이런 상황이 또 올 수 있다. 그러니 완전한 해결을 위해 우리가 조그만 힘이라도 계속 보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와타나베)

대신 전국회의는 재일 한국인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과 관련된 사안 전반으로 활동의 보폭을 넓혔다. 물론 2010년부터 시작된 재일 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재판정에 전국회의 회원들이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는 것은 ‘본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와타나베와 이시이는 지난 1월 최철교 재심 선고 법정에 고치 도루(72), 가토 다카시(70) 등 오랜 동지들과 함께 나타났다. 이날 재심 무죄 선고로 와타나베로서는 41년 만에 ‘진짜 승리’를 맛봤다.

‘한국 양심수 지원을 위한 전국회의’ 회원들은 양심수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징용 피해자, 해고노동자 등을 돕는 일에도 활발하게 참가하고 있다. 2017년 3월8일 일본 사이타마현 산켄전기 본사 앞에서 고 노회찬 의원(가운데)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산연(산켄전기의 한국 회사) 노조의 해고자 복직 요구 집회에 와타나베 가즈오(오른쪽 둘째), 이시이 히로시(맨 왼쪽), 고치 도루(오른쪽 둘째), 기타하라 레이코(왼쪽 다섯째) 등의 모습이 보인다. 맨 오른쪽은 한국산연 노조를 돕는 모임을 만든 일본의 사회운동가 오자와 다카시. 한국산연 노조는 2017년 6월 해고자 전원 복직을 이뤘다. 금속노조 경남지부 제공
2017년 4월7일 일본 산켄전기 본사 앞에서 한국산연 노조 원정투쟁단의 시위를 지원하고 있는 이시이 히로시(맨 왼쪽). 레이버넷 재팬 제공
한국 사회운동 및 노동운동과의 끈끈한 연대는 이들의 ‘친한(親韓) 활동’이 어디까지 확대돼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주4·3 피해자들의 60주년 기념 고향방문단(2008년)에 동행하는 등 제주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것은 대표적 사례다. 두 사람은 또 제1360회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2018년 11월7일)에도 일본 시민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일본에서 벌어지는 한국인의 각종 투쟁 현장에서도 두 사람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도쿄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벌어지는 징용 노동자 배상 촉구 시위는 그런 장소 중 하나다. 부당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면서 2016년 10월부터 240일 가까이 계속된 경남 창원의 한국산연(일본 산켄전기가 한국에 세운 회사) 노동자들의 일본 원정투쟁 때도 와타나베와 이시이는 다른 회원들과 함께 각종 지원 활동을 벌였다. 한국산연의 해고노동자 36명은 결국 2017년 6월 전원 복직이라는 승리를 얻었다.

“전국회의 등 일본 시민단체의 지원이 없었다면 원정투쟁에서 승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일본 사이타마현에 있는 산켄전기 본사 앞에서 출퇴근 시간에 벌인 피켓시위와 사장 집 앞에서 벌인 항의집회 등에 와타나베와 이시이 선생 등 일본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동참하고, 회사가 교섭에 응하도록 창구를 주선해준 게 큰 힘이 됐다.”(정영현 금속노조 경남지부 교육선전부장)

두 사람이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한국 시민들과 연대한 지도 40년이 훨씬 넘었다. 오랜 활동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이들의 존재조차 잘 모른다. 서운한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특별한 일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기에 그런 마음은 전혀 없다. 생명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특히 한국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들이 대부분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독재를 했던 박정희도 일본군과 관계가 있지 않으냐. 그런 면에서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민중들이 굴하지 않고 민주화 등을 이룬 데 대해 감동받았다.”(와타나베)

“구원회 활동을 하면서 김승훈 신부님과 문익환·박형규 목사님, 조만조 어머니(이철 장모) 등 한국의 훌륭한 민주 인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저한테는 정말 좋았다. 2016년 말 촛불시위 때 목격한 한국 민중의 거대한 힘은 솔직히 부러웠다. 일본은 그런 것을 상상도 못한다.”(이시이)

“양심수가 석방돼 살아서 일본에 온 것이 그동안 가장 기쁜 일이었지만, 한국의 운동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기타하라)

재일 한국인 양심수 석방을 위해 일본인 구원회는 1980년 유엔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세카이>(1980년 12월호)에 실린 유엔 파견 보고대회 모습. 김종철 선임기자

[%%IMAGE11%%] “위안부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운운 부끄러워”

두 사람은 최근 일본에서 높아가는 혐한 기류와 한-일 관계 악화를 걱정했지만, 시민들의 연대와 교류를 통한 해결을 강조했다.

“정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한-일 시민들 간에 교류를 활발하게 하면 미래 세대에는 많은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서명이 무슨 큰 힘이 되겠느냐는 냉소적 반응도 있었지만, 구원운동 결과 재일 양심수들이 한명도 죽지 않고 돌아오고, 이제는 재심에서 무죄까지 받지 않나.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에 대한 책임을 다해나가다 보면 일본 사회도 조금씩 바뀌리라고 믿는다. 그럴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와타나베)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느니 운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라도 나서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와 ‘위안부’, 징용 문제 등을 젊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한-일 시민들도 민간교류를 통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그렇게 한발씩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이시이)

일견 평범한 해법일지 모르나,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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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마쓰 목사 “양심수 구원운동 덕분에 타락하지 않아”

재일 한국인 양심수 구명운동사

[%%IMAGE14%%] 재일 한국인 ‘정치범’ 구원운동은 대학교수와 종교지도자 등 일본의 지식인에 의해 시작됐다. 요시마쓰 시게루(86) 목사가 대표적이다. 도쿄 기타구 오지의 작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활동을 한 요시마쓰 목사는 1960년대 말에는 베트남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어린이 돕기 운동을 주로 했다.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가 이케부쿠로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운영하는 지식인 공부모임에서 김지하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서부터였다. 이후 1971년 가을 서승·서준식 형제를 위한 구원집회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포항제철소 건설과 관련한 기술자문에 응하다 간첩 혐의로 구속된 김철우 박사의 재판을 방청하는 등 재일 한국인 정치범에 대한 활동에 참가했다.(<조국이 버린 사람들>, 김효순 저)

당시 일본에서의 구원운동은 대부분 개별적인 모임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사형 집행 저지 등을 위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으려면 일본 의회나 정부를 움직여야 하는데 개별 구원회로는 그런 힘이 부족했다. 이에 요시마쓰 목사는 전국적인 모임을 추진해 1976년 6월 ‘재일 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전국회의’를 결성했다. 전국회의 대표로는 국제법 전문가인 미야자키 시게키 메이지대 교수가 선출됐으며, 요시마쓰 목사는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후 그는 전국회의의 대표를 하다가 1993년쯤 최철교 구원회를 이끈 와타나베 가즈오에게 바통을 넘겼다.

전국회의가 결성된 뒤 구원운동의 규모는 훨씬 커졌다. 전국회의는 1977년 9월 도쿄 한국대사관 맞은편 건물 벽에 ‘양심수에 대한 사형과 중형 판결에 항의’하는 대형 펼침막을 내건 데 이어 한국대사관 주변에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열었다. 또 일본 정부에 재일동포 양심수들에 대한 긴급 인권구제를 요청했으며, 도쿄 등 일본 전역에서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한국 민주화가 이뤄진 뒤인 1999년 전국회의는 ‘한국 양심수를 지원하는 전국회의’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일본의 구원운동이 이처럼 활발했던 것은 일반 시민들이 운동의 중심에 나서면서부터였다. 서승 형제 사건 때만 해도 지식인이 중심이었으나, 1975년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17명이 구속 기소(11·22 사건)된 뒤에는 피해자들의 학교 동창이나 동네 이웃, 학부모, 교사 등 평범한 시민들이 앞장서 구원회를 구성했다. 최철교 구원회의 주요 회원 중 한 사람인 고치 도루는 최철교 집에서 가까운 병원의 원무과 직원이었다. 이동석 구원회를 이끈 다무라 고지는 대학생 출신의 공장 노동자였다. 이철 구원회 역시 이시이 히로시처럼 중·고교 동창이 주축을 이뤘다. 이철 구원회는 지금까지도 조직을 유지하면서 친목 도모와 함께 재일 한국인 등과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다.

[%%IMAGE15%%] 학연과 지연 등으로 얽힌 이들은 연대의식이 강해서 각종 구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의 풀뿌리 활동에 힘입어 여러 지방의회들은 양심수 석방 결의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구마현의 기초단체 몇곳에서 1976년 ‘이철 구명 탄원 결의’를 한 것, 오사카시의회가 ‘이동석씨의 조속한 석방에 관한 요망 결의’(1976년 6월), ‘이동석의 석방과 조속한 귀일을 요망하는 결의’(1980년 7월), ‘윤정헌씨의 조속한 석방을 요구하는 요망 결의’(1985년 7월) 등이 대표적이다.

요시마쓰 목사는 재일 한국인 양심수 구원운동을 했던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2년 전 은퇴한 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93)를 혼자 돌보고 있다. 지난 7일 오전 도쿄 오지역 앞 카페에서 만난 요시마쓰 목사는 “5·18 광주항쟁 직후 한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다가 기동경찰에 붙잡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하는 등 때때로 힘들고 괴로웠지만, 싸움 자체는 즐거웠다. 더구나 그들이 다 무사히 돌아온 것은 기적이다. 우리의 운동이 조금은 힘이 됐을 것이다”라며 “일부 사람들은 구명 대상인 사람의 인간됨이 어떻느니, 그가 돌아온 뒤에 어떻게 변했느니 하면서 구원운동의 성과를 낮춰 평가하기도 하는데 저는 그들이 살아온 것 자체가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이 중요한 것이지 석방 뒤에 어떻게 변하는지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못 된다. 본래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저는 구원운동에 감사한다. 덕분에 타락한 목사가 안 됐다”고 말했다.

도쿄/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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