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정책 연구자 가수 ‘블랙넛’이 형법 제311조(모욕죄)에 근거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래퍼 키디비의 사진을 보며 자위를 했다고 고백하거나 신체 일부를 거론하며 품평하는 블랙넛의 랩 가사는 비난받아 마땅한, 명백한 여성혐오 표현이다. 그러나 블랙넛을 형사 처벌하는 것이 옳은가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모욕죄는 득보다 실이 많은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모욕적인 표현도 타인에 대한 견해의 표명이다. 헌법재판소는 상업적 표현 및 음란물, 광고, 청소년 이용 음란물까지도 모두 헌법적 보호 대상이라고 판시했다. 물론 자유에도 한계가 있으니 규제가 필요하다. 문제는 모욕죄가 우리가 원하는 그런 규제인가이다. 모욕죄의 유무와 형량은 공공장소에서 욕설을 들은 자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다. 특정 언사가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는지 그 반대인지는 사람들 사이에 편차가 크다. 모욕죄가 모든 경멸의 표명을 규제하는 순기능이 있으므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경멸, 즉 혐오표현 규제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사회적 약자라는 대상 역시 매우 상대적인 개념일 수 있다. 블랙넛 또래의 남성들에게 사회적 약자는 여성도 장애인도 성소수자도 아닌 바로 본인들일 수 있다. 모욕죄 유무를 좌우하는 이와 같은 주관성과 상대성은 정작 보호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2017년 20대 여성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 웹툰작가를 “한남충”이라고 지칭해 모욕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모욕죄의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일상 언어가 뿌리 깊은 성차별의 근원임을 우리 사회가 깨닫게 한 효과적인 액션이었다. 미러링은 여성들이 성적 금기, 억압, 피해자의 위치 등을 깨고 여성의 주체성을 극도로 발현하게 만든 수단(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수단이 모욕죄에 의해 처벌받은 것이다. 부정적이고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필요하다. 주류 집단이, 주도권을 쥔 자들이 누리는 권리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약자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일은 누군가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표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모욕죄는 사회적 약자의 입을 막는다. 실제로 외국의 인종 혐오 표현 형사벌은 소수민족의 저항언어를 처벌하고 있다. 블랙넛의 가사는 힙합 특유의 자폭 예술이다. 헤게모니 남성성에 저항하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여성은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수치, 멸시를 전가하는 화풀이 대상일 뿐이다. 결국 블랙넛은 랩을 통해 이 시대 루저인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저열함을 드러내는 것이 힙합 장르의 표현 형식이라면 청중은 예술가의 의도대로 그를 비웃어주면 된다. 법적 처벌이 필요 없다. 우리들은 블랙넛의 랩이 도덕적, 사회적, 미적으로 나쁜지를 자율적으로 판단한다. 그에 동조해 키디비를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 블랙넛과 같은 유의 래퍼들에 대한 힙합계 내부의 자성적인 목소리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예술인은 사상, 감정 등의 표현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집단이면서 상이한 이념과 정체성을 가진 서로 다른 주체들로서 사회적 통념과 그 기준에 다르게 반응한다. 표현을 쉽사리 처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은 비판이라는 자율적 판단으로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평가한다. 표현을 없애버리면 어떤 것이 쓰레기인지, 왜 쓰레기인지 판단할 수 없다. 즉 표현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아니지만 자율성에 기반해 도덕적 판단을 내릴 개인의 권한을 국가가 독점하거나 탈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모욕죄는 표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국가가 규정하고 관리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모욕죄에 우려를 표하며 혐오죄, 차별금지법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왜냐면 |
[왜냐면] 블랙넛 모욕죄 판결, 양날의 검 될 수 있다 / 오경미 |
문화정책 연구자 가수 ‘블랙넛’이 형법 제311조(모욕죄)에 근거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래퍼 키디비의 사진을 보며 자위를 했다고 고백하거나 신체 일부를 거론하며 품평하는 블랙넛의 랩 가사는 비난받아 마땅한, 명백한 여성혐오 표현이다. 그러나 블랙넛을 형사 처벌하는 것이 옳은가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모욕죄는 득보다 실이 많은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모욕적인 표현도 타인에 대한 견해의 표명이다. 헌법재판소는 상업적 표현 및 음란물, 광고, 청소년 이용 음란물까지도 모두 헌법적 보호 대상이라고 판시했다. 물론 자유에도 한계가 있으니 규제가 필요하다. 문제는 모욕죄가 우리가 원하는 그런 규제인가이다. 모욕죄의 유무와 형량은 공공장소에서 욕설을 들은 자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다. 특정 언사가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는지 그 반대인지는 사람들 사이에 편차가 크다. 모욕죄가 모든 경멸의 표명을 규제하는 순기능이 있으므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경멸, 즉 혐오표현 규제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사회적 약자라는 대상 역시 매우 상대적인 개념일 수 있다. 블랙넛 또래의 남성들에게 사회적 약자는 여성도 장애인도 성소수자도 아닌 바로 본인들일 수 있다. 모욕죄 유무를 좌우하는 이와 같은 주관성과 상대성은 정작 보호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2017년 20대 여성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한 웹툰작가를 “한남충”이라고 지칭해 모욕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모욕죄의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일상 언어가 뿌리 깊은 성차별의 근원임을 우리 사회가 깨닫게 한 효과적인 액션이었다. 미러링은 여성들이 성적 금기, 억압, 피해자의 위치 등을 깨고 여성의 주체성을 극도로 발현하게 만든 수단(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수단이 모욕죄에 의해 처벌받은 것이다. 부정적이고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필요하다. 주류 집단이, 주도권을 쥔 자들이 누리는 권리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약자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일은 누군가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표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모욕죄는 사회적 약자의 입을 막는다. 실제로 외국의 인종 혐오 표현 형사벌은 소수민족의 저항언어를 처벌하고 있다. 블랙넛의 가사는 힙합 특유의 자폭 예술이다. 헤게모니 남성성에 저항하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여성은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수치, 멸시를 전가하는 화풀이 대상일 뿐이다. 결국 블랙넛은 랩을 통해 이 시대 루저인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저열함을 드러내는 것이 힙합 장르의 표현 형식이라면 청중은 예술가의 의도대로 그를 비웃어주면 된다. 법적 처벌이 필요 없다. 우리들은 블랙넛의 랩이 도덕적, 사회적, 미적으로 나쁜지를 자율적으로 판단한다. 그에 동조해 키디비를 낮게 평가하지 않는다. 블랙넛과 같은 유의 래퍼들에 대한 힙합계 내부의 자성적인 목소리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예술인은 사상, 감정 등의 표현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집단이면서 상이한 이념과 정체성을 가진 서로 다른 주체들로서 사회적 통념과 그 기준에 다르게 반응한다. 표현을 쉽사리 처벌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은 비판이라는 자율적 판단으로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평가한다. 표현을 없애버리면 어떤 것이 쓰레기인지, 왜 쓰레기인지 판단할 수 없다. 즉 표현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아니지만 자율성에 기반해 도덕적 판단을 내릴 개인의 권한을 국가가 독점하거나 탈취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모욕죄는 표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국가가 규정하고 관리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모욕죄에 우려를 표하며 혐오죄, 차별금지법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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