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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15 17:50 수정 : 2019.07.15 19:29

뤼스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의 존재론적 차이는 결국 몸이다. 출산과 임신을 경험할 수 있는 몸인가에 따라 그 둘은 섹슈얼리티적인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리가레는 이런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가 타자이면서 동시에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은 여성으로서, 남성은 남성으로서 주체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를 타자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단순한 타자화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다시 말해 서로의 차이를 인지하되, 여성과 남성 간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리가레가 주장하는 ‘성차’는 현대사회에서 경험적으로 볼 때 몸, 즉 섹슈얼리티로만 환원되기 힘들다는 점이다. 섹슈얼리티로부터의 해방이 이뤄지고 출산과 임신이 생명공학의 발달로 여성의 역할에서 제외된다면, 과연 모든 여성이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예컨대 엠티에프(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들과 인터섹스(Intersex·간성)의 존재론적 가치는 그렇다면 부정되는 것인가? 이런 쟁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한국에서는 최근 ‘일부’ 낙태죄 폐지 시위에서 생물학적인 여성만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그들은 여성인가? 이리가레가 말하는 존재론적 차이, 즉 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여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섹슈얼리티의 관점에서만 보면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진다. 그러나 젠더라는 관점과 함께 본다면 오히려 답은 쉽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엠티에프에 대해 일부는 그들이 ‘여성성’을 재생산한다는 비판을 가하지만, 만약 젠더의 구분 자체가 없어진다면 어떠할까? 그들은 그저 치마를 입는 것이 좋고, 화장을 하기 좋아하고, 머리를 기르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된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특징들이 여성성이라는 젠더로서 표현되었다면, 젠더가 해체된 이후로는 그러한 특징들이 더 이상 여성성으로 불릴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페미니즘 정치에서는 두 가지 운동이 같이 가야 한다고 본다. 출산과 임신에 대한 해방 운동(섹슈얼리티 해방)과 젠더의 해체(및 재구조화) 운동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퀴어 이론’으로부터 젠더와 비슷한 개념인 ‘주체성’을 해체하자는 담론이 등장한 바 있다.

다른 얘기지만, 국제정치를 전공하려는 사람으로서 국제적 연대에 대해서도 짧게 코멘트를 달아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런 페미니즘 운동이 사회적 힘을 얻고, 결과적으로 모든 여성의 해방으로까지 이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그 단초를 국제적 연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제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여성억압의 실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나는 이 억압의 구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와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적 체제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핵심이자 공통점은 바로 가족이라는 토대다. 가족이라는 하나의 단위가 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똑같이 작용한다. 따라서 국제적 연대는 바로 이 ‘가족’이라는 제도를 타파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랬을 때 남는 질문은 “현재의 국제여성기구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중점적인 어젠다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국제정치 연구자라면 추후 과제로서 이에 대해 고민해봄직하다.

이산
대학원생·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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