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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19 17:22 수정 : 2019.08.20 14:14

엄마부대 회원들이 2017년 2월, 박근혜 탄핵 각하를 촉구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한국의 극우세력은 전성기의 위세를 되찾기가 요원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점잖은 척 쓰고 있었을 가면도 내던지고 무리한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다. 소위 말하는 ‘보수의 품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들을 두고 ‘너희는 극우도 아니다, 진짜 보수는 다르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레토릭으로만 쓰면 좋겠지만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만만찮아 보이고, 최근 <한겨레>에는 ‘‘엄마부대’는 극우가 아닙니다’라는 칼럼(8월12일치)도 실렸다. 과연 그들은 보수, 우익이 아닐까.

좌·우파라는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 때는 프랑스 혁명기로 알려져 있다. 구체제(앙시앵 레짐)를 타파하고 권력을 잡은 국민공회에서 자코뱅이 좌측에, 지롱드가 우측에 자리잡은 것이 그 유래라고 한다. 강경파인 자코뱅과 온건파인 지롱드가 유래였기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쪽을 좌파, 보수적인 쪽을 우파로 일컫게 된다. 강경과 온건을 가르는 기준은 혁명의 추진과 구체제의 처분에 대한 관점이었다. 혁명을 계속 추진하고자 했던 자코뱅은 바렌 사건을 두고 루이 16세의 처형을 주장했고, 혁명을 마무리짓고 적당히 입헌군주제로 타협을 보려던 지롱드는 강력히 반발했다. 좌파는 앙시앵 레짐에서의 완전한 단절을 꾀했고 우파는 근본부터 바꾸기보다는 개선해서 유지하는 것을 선택했다.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좌·우파를 가르는 본질적 내용은 구체제 헤게모니에 대한 관점이다. 좌파는 구체제를 단절과 붕괴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우파는 개선 또는 타협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흔히 거론되는 민족주의, 국가관, 안보 등은 좌·우파가 갖는 속성일 수는 있어도 본질적 기준은 될 수 없다. 일례로 식민지 시절을 겪은 제3세계 독립운동 세력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지 않은가.

따라서 엄마부대를 위시한 논란의 세력들이 정말 ‘보수우파도 아닌지’는 한국 구체제에 대한 태도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구체제는 무엇인가? 해방정국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한 부일매국노 세력과 이후 권력을 강탈한 군사독재 세력이 구축한 권위주의 체제가 앙시앵 레짐이요, 그것을 타파하려는 시도가 87년 민주항쟁일 것이다. 엄마부대 등이 한국의 앙시앵 레짐을 지지하는 것이 맞다면 그들을 극우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엄마부대는 세월호 유족 비난 시위와 위안부 합의 지지 시위, 계엄령 선포 요구 집회 등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집단의 행동이 곧 성향을 대변하니 이들이 주도한 집단행동의 성격을 살펴보자. 내재적 성격은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다. 시민의 죽음을 국가가 은폐해도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불온하게 굴지 말라고 몰아붙이며, 시민의 권리를 국가가 동의 없이 팔아넘겨도 ‘정부의 성과’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외재적 성격은 구체제 세력에 대한 지지다. 그들의 공통점은 박근혜로 대표되는 구체제 정통 후계세력의 주장과 항상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는 박근혜 실각 이후에도 유지된다. 이들은 망상에 빠진 ‘극’이 아닌 철저한 구체제의 ‘극우’ 지지자라고 봐야 한다.

‘좌파도 아니다, 우파도 아니다’는 꽤 특이한 담론이다. 집단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추태를 부리는 일원을 가차없이 내치고, 입장이 다른 상대방의 심기를 살피며 상대방이 속한 집단의 탕아와 애써 구분해준다. 원만한 사회생활에 도움은 되겠지만 대화는 공허해진다. 명백히 좌파인 인물이 비난받을 행동을 한다고 해서 좌파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명백히 우파인 누군가가 추태를 부린다고 해서 우파 전체가 추해지는 것도 아니다. 좌파와 진보, 우파와 보수는 하나의 정의이지 그 자체로 선해야만 하는, 정의로워야만 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국민공회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자리를 준다면 지롱드 오른쪽이어야 할 집단도 있었다. 왕당파다. 그들은 혁명 이전 지배자들의 귀환인 왕정복고가 목표였다. 87년 체제 이전 지배자들의 헤게모니를 꿈꾸는 우리의 왕당파도 훌륭한 극우이며, ‘극인 무언가’가 아니다.

최진인
사무직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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