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최근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이 주도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백두산 기슭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기습 공격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를 묘사한 액션물이다. 이 영화는 봉오동 전투의 의미에 대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독립군 연합부대의 통합정신과 강한 응집력에 의한 승리라는 해석을 내리고 있으나, 우리 독립군의 신출귀몰한 유격전술 운용, 홍범도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과 전투지휘 능력은 다루지 않았다. 원신연 감독은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 전투 상황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설명하고, 홍범도 장군이 아닌 우리 역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 모를 평범한 독립군의 역할을 부각했다고 전한다. 독립전쟁을 지도자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구성원 중심으로 재해석하는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1942년 태장춘 원작의 연극 <의병들>을 초연할 때 생존해 있던 홍범도 장군이 “나를 영웅으로 내세우지 말고, 이름 없이 희생된 수많은 독립군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만들라”고 했던 당부를, 이번에 원 감독이 실천에 옮긴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불복해 1895년 시작된 항일의병투쟁과 1907년 일제의 대토벌 작전으로 인해 만주와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긴 의병들은 독립군으로 재편돼 끊임없이 국내 침공작전을 벌였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독립전쟁을 벌여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이름도 없이 희생됐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국가적 추모시설은 무명용사의 묘이며 추모비다. 미국의 워싱턴디시 근교 알링턴 국립묘지 내에 무명용사의 묘가 있고, 워싱턴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추모비는 위병이 24시간 경호하고 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입구에 무명용사의 묘비가 세워져 있고, 프랑스 수도 파리의 상징인 개선문 바닥에는 무명용사를 기리는 동판에다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국내에는 2006년까지 동작동 서울현충원에 무명용사의 탑이 세워져 있었으나, 2007년 유해발굴감식단이 출범한 이후 임시유해보관소에 안치돼 있다. 그러나 독립전쟁 과정에서 무명용사들에 대한 예우는 정부에서 아직까지 배려하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 때 전사한 무명용사들은 법과 제도에 따라 참전했기 때문에 유해는 없지만 이름은 남아 있고 전과가 기록돼 있다.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순국선열들의 사정은 각기 다르다. 선열들은 법적으로 소집된 병사가 아니고 국가적 혜택을 바라지도 않았다. 선열들은 투철한 역사의식과 민족애로, 빼앗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정의감에서 개인적인 결심에 따라 아무 대가 없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내년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전승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이제는 독립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이름 없는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묘지와 기념비를 세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순결한 애국정신을 추모해야 될 때다. 이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들에게 감사하는 보훈정신을 세우는 길이다.
왜냐면 |
[왜냐면] 무명 순국선열 추모비를 건립하자 / 황원섭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최근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이 주도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백두산 기슭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기습 공격으로 대승을 거둔 전투를 묘사한 액션물이다. 이 영화는 봉오동 전투의 의미에 대해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독립군 연합부대의 통합정신과 강한 응집력에 의한 승리라는 해석을 내리고 있으나, 우리 독립군의 신출귀몰한 유격전술 운용, 홍범도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과 전투지휘 능력은 다루지 않았다. 원신연 감독은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 전투 상황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설명하고, 홍범도 장군이 아닌 우리 역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 모를 평범한 독립군의 역할을 부각했다고 전한다. 독립전쟁을 지도자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구성원 중심으로 재해석하는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1942년 태장춘 원작의 연극 <의병들>을 초연할 때 생존해 있던 홍범도 장군이 “나를 영웅으로 내세우지 말고, 이름 없이 희생된 수많은 독립군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만들라”고 했던 당부를, 이번에 원 감독이 실천에 옮긴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불복해 1895년 시작된 항일의병투쟁과 1907년 일제의 대토벌 작전으로 인해 만주와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긴 의병들은 독립군으로 재편돼 끊임없이 국내 침공작전을 벌였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독립전쟁을 벌여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이름도 없이 희생됐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국가적 추모시설은 무명용사의 묘이며 추모비다. 미국의 워싱턴디시 근교 알링턴 국립묘지 내에 무명용사의 묘가 있고, 워싱턴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추모비는 위병이 24시간 경호하고 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입구에 무명용사의 묘비가 세워져 있고, 프랑스 수도 파리의 상징인 개선문 바닥에는 무명용사를 기리는 동판에다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국내에는 2006년까지 동작동 서울현충원에 무명용사의 탑이 세워져 있었으나, 2007년 유해발굴감식단이 출범한 이후 임시유해보관소에 안치돼 있다. 그러나 독립전쟁 과정에서 무명용사들에 대한 예우는 정부에서 아직까지 배려하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 때 전사한 무명용사들은 법과 제도에 따라 참전했기 때문에 유해는 없지만 이름은 남아 있고 전과가 기록돼 있다.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순국선열들의 사정은 각기 다르다. 선열들은 법적으로 소집된 병사가 아니고 국가적 혜택을 바라지도 않았다. 선열들은 투철한 역사의식과 민족애로, 빼앗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정의감에서 개인적인 결심에 따라 아무 대가 없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내년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전승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이제는 독립전쟁 과정에서 희생된 이름 없는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묘지와 기념비를 세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의 순결한 애국정신을 추모해야 될 때다. 이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호국영령들에게 감사하는 보훈정신을 세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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