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철학연구소장·부경대교수 “한글을 새로 지음은 ‘문명’을 버리고 ‘오랑캐’로 되는 것이고 학문에 손해된다.” 최만리의 상소문에 나타난 선비의 생각이다. 겨레문화의 큰 자산인 한글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시 선비의 모화사상(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해 따르려는 사상)에 따른 한글에 대한 통념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중국에서 통용되는 문자를 써야 문명한 정치와 학문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었다. 문명한 정치는 유학에 따른 정치였고 학문과 교육은 그 형식으로 보면 한문 읽기와 한문으로 쓰기가 전부였다. 한문이라는 ‘기표’와 유학이라는 ‘기의’가 단단하게 결합돼 있었다. 유교 경전의 한문은 ‘성현의 말씀을 적은 문장’이었고 거룩한 것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거룩했던 것처럼, 선비에게 한문은 거룩한 것이었다. 라틴어처럼 한문도 문명과 학문의 상징이었고 나날의 말을 적는 ‘언문’과 완전히 분리돼 있었다. 우리 글자의 이름이었던 ‘언문’에는 낮추는 뜻이 있으며, 빼어난 한글을 낮추고 한문을 숭상하는 현실을 바로잡고자 주시경 선생이 ‘한글’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어학계에서는 ‘언문’이 중립적인 가리킴말로 쓰인 경우가 많이 있다는 지적과 함께 ‘언문’에 낮추는 뜻이 없었다는 논의가 점점 번져가고 있다. 이런 논의를 처음으로 편 사람은 안확이었다. 주시경을 언어학을 모르는 사람이라 비난하면서 ‘언문’에 낮추는 뜻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에 소개됐던 ‘과학적’ 언어학을 주시경 비판에 적용했다. ‘언문’을 버리고 ‘한글’을 지은 주시경 이래 조선어학회의 전통이 민족주의에 치우쳤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문’이 문명과 학문의 언어였던 한문과 대비되면서 낮추는 뜻을 갖게 됨을 몰랐다. 조선에서 학문과 교육은 언제나 한문 읽기, 한문으로 쓰기였다. 과거제도는 사실상 조선의 학문과 교육을 지배했다. 과거에서 교재가 한글로 쓰인 경우나 답안을 한글로 쓰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언문’은 오랑캐가 되는 길이며 문명의 큰 흠이다. ‘언문’이 쉽다, 빼어나다는 주장마저 ‘언문’으로 쓸 줄 몰랐다. 한문을 거룩하다고 여긴 것은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거룩한 진리와 학문의 언어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언문’은 하층 계급의 글자, 학문과 교육과는 관계없는 문자였다. ‘한글’이란 새 이름은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유교에서 나온 우리의 오랑캐 의식, ‘작은 중화’ 의식이 큰 문제였다. 문명이란 중화되기다. 동문(同文) 의식에 따르면 중국과 같은 글자를 쓰지 않으면 야만에 떨어진다. 따라서 ‘언문’을 짓고 널리 쓰기는 ‘문명’에 거스르는 행위였다. ‘작은 중화’ 의식에서는 우리 문화를 언제나 중화에 비추어 같은가를 점검하고 다른 것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빠지게 된다. 조선의 고유성, 독자성은 ‘오랑캐 풍속’이라며 배척한 경우가 많다. 최익현은 상소문에서 개화란 ‘작은 중화’를 ‘작은 일본’으로 바꾸고 ‘오랑캐’를 따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때 우리에게 일본어가 문명과 학문, 더 나아가 교육의 언어였다. 1945년 이후에는 아메리카 따르기, 작은 아메리카 되기가 ‘문명’이 됐다. 여기에 대한 상징적 사건은 2007년 동국정운식 영어 발음법 ‘아륀지’ 소동이었다. 영어 몰입 강의, 영어 논문 쓰기 우대를 통해 지금도 맹렬한 기세로 번져가는 영어는 옛날 한문과 엇비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명’이란 항상 외국 문물을 따라가는 것이며 우리말과 글은 ‘문명, 학문, 교육’에 걸림돌이거나 무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놓여 있다. ‘삼디(3D) 업종’식으로 읽다가 ‘쓰리디(3D) 프린터’로 바꾸어 읽는 관습이, 영어가 ‘선진화’ 또는 ‘문명화’의 상징이 된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문명과 학문이 우리 말글 천대의 명분이 되는 오랜 ‘전통’에 대해 비판적 반성이 절실하다.
왜냐면 |
[왜냐면] 문명과 학문, 한글의 적 / 김영환 |
한글철학연구소장·부경대교수 “한글을 새로 지음은 ‘문명’을 버리고 ‘오랑캐’로 되는 것이고 학문에 손해된다.” 최만리의 상소문에 나타난 선비의 생각이다. 겨레문화의 큰 자산인 한글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시 선비의 모화사상(중국의 문물과 사상을 흠모해 따르려는 사상)에 따른 한글에 대한 통념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중국에서 통용되는 문자를 써야 문명한 정치와 학문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었다. 문명한 정치는 유학에 따른 정치였고 학문과 교육은 그 형식으로 보면 한문 읽기와 한문으로 쓰기가 전부였다. 한문이라는 ‘기표’와 유학이라는 ‘기의’가 단단하게 결합돼 있었다. 유교 경전의 한문은 ‘성현의 말씀을 적은 문장’이었고 거룩한 것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거룩했던 것처럼, 선비에게 한문은 거룩한 것이었다. 라틴어처럼 한문도 문명과 학문의 상징이었고 나날의 말을 적는 ‘언문’과 완전히 분리돼 있었다. 우리 글자의 이름이었던 ‘언문’에는 낮추는 뜻이 있으며, 빼어난 한글을 낮추고 한문을 숭상하는 현실을 바로잡고자 주시경 선생이 ‘한글’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어학계에서는 ‘언문’이 중립적인 가리킴말로 쓰인 경우가 많이 있다는 지적과 함께 ‘언문’에 낮추는 뜻이 없었다는 논의가 점점 번져가고 있다. 이런 논의를 처음으로 편 사람은 안확이었다. 주시경을 언어학을 모르는 사람이라 비난하면서 ‘언문’에 낮추는 뜻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에 소개됐던 ‘과학적’ 언어학을 주시경 비판에 적용했다. ‘언문’을 버리고 ‘한글’을 지은 주시경 이래 조선어학회의 전통이 민족주의에 치우쳤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문’이 문명과 학문의 언어였던 한문과 대비되면서 낮추는 뜻을 갖게 됨을 몰랐다. 조선에서 학문과 교육은 언제나 한문 읽기, 한문으로 쓰기였다. 과거제도는 사실상 조선의 학문과 교육을 지배했다. 과거에서 교재가 한글로 쓰인 경우나 답안을 한글로 쓰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언문’은 오랑캐가 되는 길이며 문명의 큰 흠이다. ‘언문’이 쉽다, 빼어나다는 주장마저 ‘언문’으로 쓸 줄 몰랐다. 한문을 거룩하다고 여긴 것은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거룩한 진리와 학문의 언어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언문’은 하층 계급의 글자, 학문과 교육과는 관계없는 문자였다. ‘한글’이란 새 이름은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유교에서 나온 우리의 오랑캐 의식, ‘작은 중화’ 의식이 큰 문제였다. 문명이란 중화되기다. 동문(同文) 의식에 따르면 중국과 같은 글자를 쓰지 않으면 야만에 떨어진다. 따라서 ‘언문’을 짓고 널리 쓰기는 ‘문명’에 거스르는 행위였다. ‘작은 중화’ 의식에서는 우리 문화를 언제나 중화에 비추어 같은가를 점검하고 다른 것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빠지게 된다. 조선의 고유성, 독자성은 ‘오랑캐 풍속’이라며 배척한 경우가 많다. 최익현은 상소문에서 개화란 ‘작은 중화’를 ‘작은 일본’으로 바꾸고 ‘오랑캐’를 따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때 우리에게 일본어가 문명과 학문, 더 나아가 교육의 언어였다. 1945년 이후에는 아메리카 따르기, 작은 아메리카 되기가 ‘문명’이 됐다. 여기에 대한 상징적 사건은 2007년 동국정운식 영어 발음법 ‘아륀지’ 소동이었다. 영어 몰입 강의, 영어 논문 쓰기 우대를 통해 지금도 맹렬한 기세로 번져가는 영어는 옛날 한문과 엇비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명’이란 항상 외국 문물을 따라가는 것이며 우리말과 글은 ‘문명, 학문, 교육’에 걸림돌이거나 무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놓여 있다. ‘삼디(3D) 업종’식으로 읽다가 ‘쓰리디(3D) 프린터’로 바꾸어 읽는 관습이, 영어가 ‘선진화’ 또는 ‘문명화’의 상징이 된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문명과 학문이 우리 말글 천대의 명분이 되는 오랜 ‘전통’에 대해 비판적 반성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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