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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07 17:48 수정 : 2019.10.07 19:26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범죄학에서 피해자 범죄 유발 이론이 있다. 피해자가 우범지대나 범죄 발생이 가능한 장소에 가지 않았다면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발상이다. 이는 가해자의 폭력이 발생하도록 피해자가 빌미를 제공했다는 식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불합리한 논리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이런 시각에서 만들어진 논리에 따른 판결이 적지 않아 그 시정이 시급한 실정이다.

국내외 법정은 성범죄와 관련해 대부분 피해자가 동의했는지를 가리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과학적 연구 결과,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 발생 순간에 전신이 마비되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지고 그것이 정상적인 생물학적인 반응이라는 과학적 사실이 확인되면서 유럽 일부 국가에서 관련법이 그것에 맞게 개정됐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일시적인 무기력 증세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 결과의 하나는, 2016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사우스 종합병원이 발표했다(<로이터> 통신, 2017년 6월15일). 이 병원에 근무하는 안나 묄레르 박사 연구팀은 성폭력 피해를 본 뒤 한달 안에 스톡홀름 성폭력 피해자 긴급치료센터를 방문한 여성 298명에게 성폭행 당시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 상태를 경험했는지를 진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설문조사했다. 얼어붙은 듯 마비 상태가 된 것을 느꼈는지/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고함치거나 비명을 지를 수 없었는지/ 무감각 상태에 빠졌는지/ 한기를 느끼거나 고립감을 느꼈는지 등을. 그 결과 피해자 가운데 70%는 폭행당할 때 상당한 정도의 긴장성 무운동 상태를 경험했고, 이들 가운데 48%는 그 상태가 극심했다고 밝혔다. 긴장성 무운동 상태에서는 피해자가 최면과 유사한 상태에 빠져 외부 자극이나 고통에 반응하지 못한다.

이런 무기력증은 외부 공격에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다른 수단이 없을 때 생기는데, 조사에 응한 피해자들은 저항은커녕, 얼어붙어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됐다고 응답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폭행당할 때 고함치거나 다리를 오므리는 식으로 저항하는 게 일반적 행동인 양 인식되지만, 성폭력 피해자 상당수는 자기도 모르게 일시적인 무기력 증세에 빠져 저항하거나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연구팀은 “성폭력과 같은 극단적인 위협에 노출될 경우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한 것을 탓해서는 안 된다. 일시적 마비로 인한 무저항 상태를 동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은 정상적인 생물학적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성범죄의 법적 판단 시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는 유럽 컨벤션 의회가 2011년 5월 제정한 ‘여성과 가정폭력 예방과 근절 선언’에서 강조한 바 있다. 세계 최대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도 “미투 운동에서 강조되는 것처럼 강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인권이라는 점에서 정부는 동의 없는 성행위는 강간이라고 규정하는 법제를 추진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공화국, 벨기에, 키프로스, 룩셈부르크, 독일 등은 ‘동의 없는 성교는 강간’이라는 단순한 진실을 성범죄 처벌법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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