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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8 17:21 수정 : 2019.10.29 02:38

임호일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교육자요 철학자인 프레더릭 마이어는 일찍이 그의 저서 <편견>에서 편견을 “인류의 재앙”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 시대가 풀어야 할 핵심과제이다. 편견과 증오가 오늘날같이 만연해 있는 한 우리 인류의 미래는 결코 낙관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편견이란 도대체 어떤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일까? 사회심리학자 에곤 바레스는 “가치평가적 성격을 띠고, 주장적 성격이 강한 그릇된 판단이 궁극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고, 그러한 요구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그 판단에 매달리면서 그것을 사실이라고 주장할 경우”를 편견이라고 정의한다. 편견과 비슷한 용어로 확증편향이란 것이 있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무시하는 경향”을 뜻한다. 근래에 들어 우리 사회에서 왜 이런 용어들이 자주 인구에 회자되는 걸까?

<한겨레> 김종구 편집인은 얼마 전 그의 칼럼에서 “황교안 당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들 두 사람에 대해 먼지털기식 수사를 하면 “조 전 장관과 얼마나 다른지 속 시원한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다. 제1야당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그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공격했다.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조국 같은 비리와 부도덕의 온상은 척결되어야 한다고 한껏 목청을 높였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전형적인 증후군이다.

편견의 대표적 현상이 흑백논리다. 흑백논리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절대 진리로 내세운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기실 그 주장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비판에 의해 그 주장의 허구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할수록 더 진리를 독점하려 들며, 이 진리의 독점이 자신의 완벽성 내지 완전성을 입증할 수 있고 나아가 자신의 약점을 은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이를 두고 “편견의 신봉자들은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눈치채면 챌수록 더욱더 그 주장에 열광적으로 매달린다”고 말한다.

흑백논리에 빠진 사람은 곤경에 처하면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약점을 적대시하게 된다. 바로 이 약점 때문에 자신이 불행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적을 퇴치하는 대신에 보다 힘없는 적을 날조해낸다. 그리하여 외부에 있는 적으로부터 오점을 들추어냄으로써 자신의 불행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이른바 ‘속죄양 작전’을 펴는 것이다.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의 학살을 주도한 히틀러는 어린 시절에 주위의 친구들로부터 유대인을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이러한 집단살인교사 행위를 <편견의 정체>의 저자 고든 올포트는 히틀러의 심리적 불안에서 찾는다. “히틀러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유대인과 동일시했다. 때문에 그는 유대인에게 형벌을 가함으로써 자신을 향한 탄핵의 손길을 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언젠가 오래전에 고 강원용 목사가 한 말이 오늘도 귓전을 스친다. “정치를 비롯해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꼬인 현실의 원인을 흑백논리에서 찾아야 하며, 이 흑백논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대화뿐이다.” 언뜻 들으면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늘 이 시점에서 곱씹어보아도 정확한 현실진단이요, 올바른 처방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그리고 우리가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인정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대화에 임할 수 있을 때 꼬인 현실, 즉 사회적 갈등은 풀리고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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