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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02 18:09 수정 : 2019.12.03 14:49

석광훈 ㅣ 녹색연합 전문위원

타다와 택시, 구충제를 둘러싼 암환자들과 의료계의 대결은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우리 사회 모든 부문과 계층에 걸쳐 기존 기술·가치 체계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치열함의 정도와 속도가 다를 뿐 하이패스와 도로요금수납원, 온라인 유통과 전통 유통업계, 스마트미터와 전기·가스·수도 검침원, 운행기록 실시간 전송과 화물차의 대결도 진행 중이거나 곧 닥칠 예정이다. 눈앞의 갈등만 봉합하며 넘길 일들이 아니다. 국내 제도권은 이러한 신구 가치의 대립이 발생하면 혁신보다는 기존 이해집단의 손을 들어주는 게 관행이었다. 검찰의 타다 대표 기소나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국세청의 구충제 통관금지 조처가 대표 사례다.

그러나 구충제 사태는 식약처의 통관금지나 의료계의 ‘훈계’로 막을 수 없다. 유튜브를 통한 국내외 암환자 간 생생한 체험 사례 공유에 전문가들도 가세하며 위세가 줄지 않고 있다. 마치 중세시대에 난해한 라틴어의 진입장벽으로 성경 교리와 세상 만물에 대한 ‘해석 권한’을 독점하던 교황청의 권위가 인쇄기술의 등장 이후 쉬운 독일어 성경이 대중화되며 무너진 과정과 유사하다. 특히 얇은 팸플릿은 몸에 숨길 수도 있어 교황청의 감시를 뚫고 종교개혁을 앞당긴 신기술이었다. 교황청도 팸플릿을 활용해 맞대응했지만, 면죄부 남발 등 교황청의 부패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담긴 종교개혁 팸플릿의 위세를 꺾지 못했다. 기존 항암제의 심각한 부작용에 면죄부를 주면서 구충제의 불확실한 부작용만 선택적으로 강조하는 의료계의 유튜브가 외면되는 국내 현실이 겹쳐진다.

사실 구충제 사태는 기존 의료시장의 실패를 넘어서기 위한 서구 의료개혁 운동의 여파이기도 하다. 벨기에 항암재단(ACF) 등 의료개혁 그룹은 통상 10여년의 시간과 2조원 이상이 드는 항암 신약 개발 과정이 사회적 부담을 키우면서도 절박한 암환자들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한다고 지적해왔다. 반면 학계에 알려진 항암기능에도 제약사들의 이윤창출 구조에 맞지 않아 항암제 시장에서 배제되어온 구충제, 당뇨약 등 몇몇 일반약품을 ‘용도 변경’할 경우 시간과 비용을 절반 이하로 줄인다는 것이다. 구미 각국은 이러한 개혁 요구를 수용해 이들의 항암효과에 대해 수백건의 임상시험을 진행해왔다. 영국은 5년째 정부 감독 아래 민간병원이 저비용 임상시험을 진행해 구충제·당뇨약·항생제·고지혈증약 ‘칵테일’로 이미 상당수 암환자를 완치했고, 악성 뇌종양에서도 표준 치료군 대비 갑절 넘는 생존율을 보고했다. 미국은 3년째 정부 후원으로 구충제 단일 처방의 항암효과에 대해 임상시험 중이다. 식약처와 의료계는 암환자들에 대한 훈계에 앞서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닌지 되돌아보기 바란다.

다만 신기술 확산으로 아예 직종이 사라지는 경우는 의료계 같은 엘리트 계층에 비해 당사자들이 느낄 체감이 다르다. 신기술의 진입을 막는다고 해서 당장 눈에 띄는 사회적 피해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국내 전통 산업들이 쇠퇴기에 접어든 현실에서 신기술의 확산을 계속 지연하면 우리 사회는 경쟁력을 잃게 된다. 영국 산업혁명의 동력이었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보다 60년 앞서 증기선을 개발하고도 뱃사공 길드의 반발에 꺾여 산업혁명에서 뒤처졌던 18세기 독일의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에너지 자원과 시간을 절약하는 대체산업의 등장에도 단순노동 직종을 연장시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개인의 자아실현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신구 가치의 대결에서 당사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일은 ‘간헐적 연민’이 아니라 직종 전환기의 체계적 교육, 충분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제도 개혁이다. 물론 시장 혁신과 사회적 안전망 확충은 대립되는 일이 아닌데도 현실은 쉽지 않다. ‘시장의 실패’에만 집중해도 되는 선진국들과 달리, 우리는 정부조직과 국회의 실패도 만만치 않은 문제다. 국내 제도권이 세계 추세와 동떨어진 한국식 좌우 논리와 구태의연한 지식 체계를 신앙처럼 떠받드는 현실에서 새로운 기술과 가치를 포용하려면 기존 이해관계에 기댄 단편적 전문성을 넘어 집단지성의 조직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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