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09 18:24
수정 : 2019.12.10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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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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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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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일주일을 기다리게 해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종영했다. 스마트폰이 익숙해져 무용하던 티브이가 지난 몇달간 그나마 쓸모 있던 시간이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모두가 인정받고 싶어한다. 철물점을 운영하는 흥식이는 “저 아저씨가 뭘 알겠어?”라는 어린아이의 말에 분노해 사람을 죽인다. 싱글맘이자 술집 사장인 동백이는 마을 사람들의 속닥거림에 눈물을 흘리곤 한다. 내로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그렇다. 변호사인 자영은 그의 남편에게 여자로서 인정받고 싶어하고, 유명한 야구선수인 종렬은 필구에게 아빠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인간은 모두 인정받고 싶어한다. 사회라는 거대한 컨베이어벨트를 빠르게 지나가는 통조림 같다. 스티커가 잘못 붙었다든가, 뚜껑이 삐뚤어졌다든가 하는 보잘것없는 이유로 그 자체가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동백이도, 까불이도 될 수 있다. 동백이와 까불이 모두 엄마 없이 자랐고 인정받을 만한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 둘은 비슷하다. 그러나 무시 속에서 고꾸라지지 않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보다는 웃어 보이는 동백이는 더 단단해져서 자기를 스스로 지킨다. 두꺼운 맥주잔으로 까불이의 머리를 내려친다.
물론 동백이를 지켜낸 그 배경에는, 철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지속적인 용식이의 따뜻함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인정해주는 마음 가득한 따뜻함이었다. 어떤 상황에도 “걱정하지 말아유. 동백씨는 행복하실 수밖에 없어유”라고 말해주는 용식이야말로 동백이를 동백이보다 인정해주는 사람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아파트가 아닌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옹산이라는 장소도 동백이를 지키는 데에 한몫을 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중국음식 배달원에게 “얼마예요?”라는 한마디조차 필요하지 않게 된 요즈음, 동백이를 질투하고 괴롭히면서도 김장김치를 가져다주고 떡을 가져다주는 인정(人情)이 동백이를 지켰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가 떠올랐다. 전쟁을 끝내는 것은 기필코 이겨야 한다는 복수심이나 총과 칼 같은 이성적인 무기들이 아니라 감정이다. 이 전쟁을 멈춰내야 한다는 깊은 마음이고 넘어진 사람에게 내미는 작은 인정이다. 그림 속, 아이를 지키려는 여인들의 마음과 같이, 드라마에서는 그 인정이 모여 필구를 ‘아빠 없이 자랐다’는 편견에 갇힌 아이가 아니라 세계적인 메이저리거로 만들어내고 끝이 났다. 해피 엔딩이다.
그러나 현실은 끝나지 않았다. 편견 가득한 문장 하나에 주저앉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드라마보다 소름 끼치는 살인사건들이 계속된다.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을 찾았지만 처벌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할 새도 없이 또 누군가는 3살짜리 딸을 죽였다. 젊은 작가 한명이 옆집에 ‘남은 밥과 김치’를 부탁하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는 요절한 8년 전 일을 아직 잊지도 못했는데, 서울 성북동에서 70살 어머니와 40대 딸 3명이 ‘그동안 힘들었어요. 죄송합니다. 하늘나라로 갑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지난달 2일 숨진 채 발견됐다.
그들에게 용식이가 동백이에게 해줬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들려왔다면 어땠을까? 마을 사람들의 진심 어린 마음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백화점이든 편의점이든 어디를 가도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있다. 길거리에도 블랙박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살인사건은 계속된다. 판옵티콘 사회가 아니라 인정해주는 사회가 필요하다. 까불이가 두려워하는 건 시시티브이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죽었다. 우리의 한마디로 지킬 수 있었던 생명이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하다. 나는 까불이가 될 것인가, 동백이가 될 것인가. 오늘은 거울 속 동백이에게, 내일은 주위의 동백이에게 포근한 말 한마디 걸어보는 게 어떨까.
김혜연 ㅣ 대학생·인하대 정치외교학과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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