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30 18:20
수정 : 2019.12.31 02:38
윤형식 ㅣ 서울과기대 강사(철학)·전 한국정책방송원 원장
원래 계획대로라면 2020년 새해 초부터 50~299인 사업장으로 주52시간 초과근무 금지 제도가 확대 시행돼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시행을 20여일 앞두고 최장 1년6개월까지 확대를 유예하고, ‘모든 기업에’ 특별연장근로 허용 사유를 폭넓게 인정해주기로 했다. 정부는 주52시간 초과근무 금지 제도의 안착을 위한 보완책이라고 하지만, 안착은커녕 노동시간 단축 정책을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경영상 사유’ 등 포괄적인 특별연장근로 허용 방침을 달리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정부가 든 유예 이유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기업 편을 들 때 으레 나오는 말, ‘국가경쟁력’이 눈에 띈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은 문재인 정부의 국가경쟁력 강화책이다. 그런데 소득주도성장의 정책 기반이라 할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은 지난해 이미 파기했다. 이번 노동시간 관련 확대 유예 조처는 더 많이, 더 오래 일해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혁신성장의 포기다.
2018년 대한민국 노동자는 연간 1993시간을 일했다. 일 많이 하기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3등이다. 평균 1734시간보다 200시간 넘게 더 일했는데도 더 오래 일하자는 게 정부의 이번 유예 조처다. 국가경쟁력 하면 독일이 세계 1위라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독일은 연간 ‘겨우’ 1363시간 일한다. 독일은 ‘산업 4.0’이란 기획 아래 제조업 혁신을 추진 중이다. 대기업처럼 중소기업 공장도 스마트공장으로 바꾸자는 게 핵심이다. 2011년부터 본격 추진했다. 그런데 더 줄일 여지도 없을 듯한 독일의 노동시간은 그새 연간 30시간이 줄었다. 제대로 된 혁신성장의 결과일 것이다.
혁신은 희생을 요구한다. 혁신 대상이 반발하는 건 당연하고, 예상 가능하다. 정부는 적어도 1년10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그간 중소기업 임금체계를 바로잡아 주52시간제로 소득이 줄어들 중기 노동자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한편, 진정한 중기 혁신지원책을 강구했어야 했다. 준비와 대책 없이 혁신성장만 되뇌다 혁신 대상이 반발하니까 다시 약자를 희생양 삼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일을 더 해 국가경쟁력을 높이자는 이들은 대체로 경제논리를 좋아한다. 사실 혁신성장을 하려는 정부라면 노동시간 정책에서 일관되게 경제논리를 따랐어야 했다.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이 최상의 혁신정책임을 증명한다. 경쟁력 없는 기업이 도태되는 건 당연하다. 국가가 개입해 연명시키려 해선 안 된다. 혁신의 핵심 동력은 시장의 강제다. 바로 경제논리다. 그럼 기업 도태의 희생자들은 어떡하냐고? 이를 대비하는 게 복지국가다. 여기선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연대의 논리가 작동한다. 국가가 시장경쟁의 희생자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혁신성장과 포용적 복지는 이렇게 연결돼야 한다.
주52시간 초과근무 금지 확대 유예에 앞장선 건 중기업계지만 정부의 ‘보완책’을 보면 진짜 수혜자는 대기업이다. 소상공인을 앞세운 지난번 최저임금 인상 반대 투쟁 때처럼 재계는 이번엔 중소기업을 앞세워 정부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일부에선 아예 이 제도를 그만 접자고 부르짖는다. 이 정부가 진정 혁신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를 원한다면 기업가들의 말만 들어선 안 된다. 공익보다 사익을 더 고려하기 마련인 그들의 제안은 “어떤 것이든 항상 큰 경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고도로 세심하고 신중한 주의력을 발휘하여 오래도록 꼼꼼히 검토한 뒤에 채택해야 한다. 이런 제안은 … 사회를 기만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 되며, 따라서 수많은 기회에 사회를 기만하고 억압한 적이 있는 계급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국부, 즉 국가경쟁력 강화의 본질과 원인에 대해 최초로 깊이 있게 분석한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건넨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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