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3 18:48
수정 : 2005.02.13 18:48
사무실에서 창문을 열면 미국대사관이 보인다. 이 엄동설한에 이민 수속을 위해 대사관 담장을 끼고 끝없이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은 우리 사회의 단면이 아니겠는가.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선택적 결과가 아닌 운명적 결과이다. 한국민으로서의 일정한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이민은 하나의 ‘사건’일 터이다. 그런데 이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떠나려는 사람들도 많다. 이 땅에 희망이 없어서라고 한다. 혹자는 정직과 능력보다 정실과 지연이 우선하는 사회에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한다. 언제 퇴출될지 모를 만큼 직장은 불안하고 이미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재고용 희망이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치열한 경쟁 메커니즘과 이와 연동하는 사교육비의 부담 때문이란다. 엄청난 사교육비의 고통을 감내하고 교육을 시키더라도 자녀의 장래가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적어도 하와이 이민 때처럼 배가 고파 떠나는 이민은 아니다. 인간은 밥 외에도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다. 배고픔 못지않게 희망의 잃음은 조국을 떠날 이유가 될 것이다. 오죽하면 떠나려 하겠는가. 저마다 이 생각 저 궁리 다하고 결정했을 것이다. 새 세계에서 희망을 찾는 일은 얼마든지 환영할 만하다. 좁은 땅을 박차고 나가 넓은 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자식들을 기회 많은 땅에서 살게 하겠다는데 누가 뭐랄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이민 열풍과 더불어 원정 출산의 문제, 심지어 한국과 미국 이중국적일 때 하나를 택하라면 미국 국적을 택하겠다는 대학생이 많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우리나라를 탈출하고자 하는 열풍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민에 솔깃한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외국에 대해서는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과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여 지금의 국가가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관심을 갖고 이민 경험자들의 충고를 들어보면 외국의 삶이 얼마나 냉혹하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현실의 삶이 힘겨우니 이민이나 가겠다는 식의 해결 방식은 옳지 않다. 오늘의 이민 열풍에서 어려움을 극복해보겠다는 꿋꿋함보다는 신기루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나약함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 사회가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경제력이 없어진 늙은 부모를 버릴 수 없는 자식처럼 아직은 이 사회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저마다 회색빛 사연들을 안고 조국을 등지고자 하는 저 행렬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우리 함께 했으면 한다.
문상배/서울시립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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