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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5 18:13 수정 : 2005.02.15 18:13

건국 이래 최초로 ‘버릇없는’ 영화가 탄생했다. 어느 일간지의 리뷰에서 ‘버릇없다’라는 수식어를 붙여준 한국 영화 〈그때 그 사람들〉. 오죽했으면 바쁘디바쁜 현직 판사님께서 영화의 최종 편집에 직접 관여를 하셨을까?

아무튼 이 ‘버릇없는 영화’가 탄생한 배경을 살펴보려면, 영화를 만든 임상수 감독의 신원조회부터 들어가야 한다.

우선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 과년한 처녀 세 명이 방바닥에 드러누워 허옇고 긴 날다리 여섯 개를 유리창 위로 뻗고 있던 포스터를 기억하시는지? ‘무릎 위 10㎝’ 측정까지 하면서 미니스커트 길이를 단속하던 유신시대였다면 개봉은커녕 포스터조차 통과가 안 됐을 작품이다. 두 번째 영화인 〈눈물〉. 막나가는 청소년들을 다룬 영화로서, 예고편을 통해 감독이 직접 ‘이건 쌩양아치 영화다’라고 뻔뻔스럽게 선언하는 작품. 세 번째 영화 〈바람난 가족〉. 운전 중에도 애인과 오럴섹스를 즐기는 유부남 변호사, 옆집 고교생을 꼬시는 그의 아내, 노년에 접어들어 색에 눈뜨는 어머니 등등, 실로 점입가경의 콩가루 무비!

결론적으로 임상수는 화려한 전과기록의 소유자다. 그런데 이런 임상수 감독이 이번에 급기야는 유신의 심장, 박정희 최후의 그날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고야 만 것이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각하’ 최후의 그날을 정색하고 엄숙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몹시 낄낄거리며 희롱하듯 다루고 있다는 데 사태의 핵심이 있다! 즉, 영화를 보고 나면 장엄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목도한 중후한 탄식보다는, “참 나… 놀구들 자빠졌네”라는 후렴구를 자연스레 내뱉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 영화는 그저 낄낄대며 즐기면 되는 영화인 것이다! 물론 약간의 슬픔과 씁쓸함도 뒤따를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한심하게 살았었구나, 이런 한숨도 지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영화는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다 같이 ‘낄낄대는’ 영화이다.

작년 가을쯤이었던가, 〈살인의 추억〉 때 함께 작업했던 송재호 선생님과 점심식사를 하던 중, “봉 감독, 내가 웬일로 박정희 역을 다 하게 됐어”라고 자랑하셨을 때, 나는 의외성 넘치는 캐스팅에 놀라며, 동시에 ‘아, 이 영화 뭔가 색다른 분위기겠구나’라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완성된 영화를 보니 박정희로 분한 송재호 선생님에다 한석규, 백윤식, 김응수, 권병길, 정원중 등등 노련한 배우들이 가세하면서 10·26 그날은 점입가경의 블랙코미디, 지리멸렬 소동극으로 치닫는다. 그렇다. 이 영화는 10·26 영화이기 이전에 코미디 영화이며 백윤식, 한석규, 송재호 등등 명배우들의 명연기가 펼쳐지는 영화이며, 김우형 촬영감독의 도전적 화면들이 빛나는 영화이며, 이 수많은 요소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해서 먹기 좋게 펼쳐놓은 임상수표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웃자고 만든 영화가 정치계와 법조계, 텔레비전 심야토론 등등에 뒤얽히면서 골아픈 말썽쟁이 취급을 당하고, ‘영화가 버릇없다’라는 생뚱맞은 소리까지 듣고 말았다. 그러나 진정 ‘버릇없는’ 것은 임상수가 아니라 바로 ‘박정희와 그 일당들’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 그들이 술자리에 가수 심수봉씨와 여대생을 불러들이는 (실제 사실에 근거한) 장면이 나온다. 심수봉의 노래가 듣고 싶다면 콘서트장에 가든가 할 일이지, 술자리에 불러다 놓고 이걸 불러라 저걸 해봐라 시시덕거리는 꼴이라니! 하지만 그런 시절은 흘러갔다. 이젠 정반대이다. 평범한 관객들이 영화의 힘을 빌려 독재자와 그 일당을 눈앞의 스크린에 불러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그들의 코미디를 감상하면 되는 것이다.

비록 느려터지긴 하지만 역사는 참 제대로 굴러간다.

봉준호/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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