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5 18:16
수정 : 2005.02.15 18:16
그저께 월요일 초저녁, 우수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도 겨울 날씨인 서울의 어느 거리에 200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대부분 초라한 차림에 배낭을 메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연두색의 소형 트럭이 도착했다. 차에서 식판과 식기가 내려지고 사람들은 자원봉사자들 앞에 줄을 지어 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한 그릇과 숟가락을 받아든 사람들이 제각기 한 모퉁이씩 차지하고 조용히 식사를 한다. 이들 곁으로 롱코트를 걸친 젊은 연인들이 밸런타인 꽃바구니를 들고 행복하게 웃으며 지나갔다.
물질이 어느 정도나 있으면 우리가 행복해질까? 우리는 부가 늘어나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물질의 증가를 행복의 전제로 두는 점에서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는 큰 차이가 없다. 성장의 과실을 어떻게 나누느냐를 두고 생각이 갈라질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책상 위에 세계 각국의 부와 행복지수를 나타낸 도표 한 장이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부자나라가 될수록 더 행복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필리핀이나 브라질 국민들은 그보다 훨씬 잘사는 포르투갈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아일랜드, 핀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사람들도 미국보다 ‘못살지만’ 더 행복하다고 느낀다.
〈행복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낸 리처드 레이어드는 부가 늘어나도 더 행복해지지 않는 것이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라고 말한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일본의 경우에도 전후 50년 동안 무려 6배나 잘살게 되었지만 행복지수는 변치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행복의 복잡한 사회심리적 요인이 깔려 있다. 첫째는 인간이 비교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작은 집 옆에 궁전이 들어서면 그 집은 움막이 된다.” 둘째, 원했던 물질이 충족되는 순간 행복감은 곧 사라지고 또다른 목표가 생긴다. 셋째, 발전이 될수록 한 단계 높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더 커진다. 넷째, 지위에 대한 욕구도 존재의 허기를 부추겨 행복지수를 낮춘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던 배우 중에 상을 탄 사람이 탈락한 사람보다 평균 4년을 더 산다는 통계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돌아보자. 지난 40년 동안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달려 왔고,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왜 이리 자살률이 높은가? 솔직히 말해 2만달러 목표를 채운들 우리가 더 행복해질까? 무언가 근원적인 성찰을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문제는 이런 ‘철학적’인 탈성장의 관점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배부른 자의 한가한 소리로 들리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어찌 됐든 가난에서 벗어나 잘살아 보고 싶어한다. 인간의 이러한 갈망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필요한 성장이고 어디부터가 ‘문제 있는’ 성장인가? 여기서 다시 레이어드의 주장을 들어 보자. 국민소득 1만5천달러를 분기점으로 하여 더 잘살게 되어도 행복은 거의 제자리걸음 또는 심지어 퇴보하는 경향까지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수준까지의 인간욕구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리처드 윌킨슨은 어느 수준 이상부터는 발전보다 오히려 사회의 응집력과 평등이 그 사회의 건강도와 행복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장과 평등 사이의 해묵은 논쟁에 대한 어떤 암시를 얻는다.
어느덧 식사가 끝나갔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릇을 반납하고 땅거미가 깔린 거리로 사라졌다. 그중에는 내일 이맘때까지 굶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근처 붕어빵 리어카의 라디오에선 코스닥과 종합주가지수가 오르고 있다는 ‘반가운’ 뉴스가 들려오고 있었다. 1만5천달러의 고지를 눈앞에 둔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진정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의 꿈으로 비웃지 않을 만한 집단적 지혜가 우리에게 과연 있는가?
조효제/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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