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6 18:28
수정 : 2005.02.16 18:28
과거 자본과 결탁한 권위주의 정권이 물리력을 동원하여 노동을 탄압할 때, 사회 구성원들은 그래도 저항을 잉태했고, 그 저항은 민주화 운동의 씨앗이었다. 고문과 투옥, 그리고 죽음이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은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경제 지상주의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사회를 향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념으로 무장하지 않았더라도 본능적, 정서적으로 인간성의 항체를 나름으로 품고 살았다.
경제 지상주의가 지배한다는 점에서는 이른바 ‘민주화된 시대’는 박정희 정권 때나 차이가 없다. 중요한 차이는 육체가 살지고 편안해진 만큼 저항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서로 다투어 경배하며 인간성의 항체를 스스로 박멸했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신문 사회면과 방송 뉴스 시간을 채우고 있는 소식들을 보라. 마구 찌르고 불태우고 죽인다. 아비자식 사이도 동기간도 없다. 오직 돈만 있을 뿐이다.
이땅의 노동이라고 예외가 되기를 바란다면 뻔뻔하거나 수상한 수작이다. 자본과 긴장해야 하는 노동도 자본주의적 심성에 포섭되어 타락하고 분열됨으로써 자본의 영구적인 바람인 노동 통제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땅의 경제 지상주의는 거칠 것이 없을 만큼 정부나 사회 구성원들이나 모두 경제 유일신에 주술이 들려 있다. 정부의 사회 부문은 경제 부문에 예속되는 정도가 아니라 노동부가 보여주듯이 박정희의 ‘제2 경제부’가 되었다. 이름도 그럴듯한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내놓은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망과 박탈감의 외침에 대해 자본과 힘을 합쳐 비정규직 노조 위원장을 체포하는 등으로 응수하지만, 이미 사회는 이런 상황에 대해 참담할 만큼 무감각하다. 그 무감각은 물론 양면성의 반영이다. 언론과 기능적 지식인들이 자본의 탄압에 대해선 침묵하는 것과 비교해 보라. 삼성의 엽기적 노조 탄압 사건에는 침묵하지만 기아자동차 노조 채용 비리에는 사회 전체가 호들갑을 떨지 않던가. ‘개혁’ 세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한다면서 차별과 굴종을 ‘양산’할 만큼 뻔뻔스러운데, 사회는 이에 무감각할 만큼 이미 저항과 비판의 항체를 잃어버렸다.
19세기에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인문정신과 자유·비판·저항 정신의 거처인 대학을 없애려 했다. 박정희는 걸핏하면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민주화’된 21세기 한국에서 대학은 없어지거나 문을 닫는 대신 스스로 ‘산업’이 된다.
‘인문학의 위기’란 말조차 부끄럽게 되었지만, 경제 지상주의가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인문학을 없애는 것이며, 신자유주의가 비판과 저항 정신을 없애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대학을 없애는 게 아니라 대학을 산업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학이 산업일 때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교육’은 당연히 사라지고, 기업경영 용어인 ‘인적자원’만 남는다. 사회 구성원들은 천연자원, 지하자원과 동격인 인적 자원이 되며, 인적자원부는 산업자원부와 동격이 된다.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김진표씨가 인선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도 이땅의 인문 정신은 이미 사라졌는지 침묵하고 시인들까지도 그 품에서 평온한 듯하다.
그러므로, ‘개혁’으로 포장한 정치세력이 오직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부정적인 과거를 캐내는 데 열심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직 거기서만 ‘개혁’의 차별성을 보여줄 수 있을 뿐,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통해서는 보여줄 게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왜곡된 상부구조를 바꾸는 ‘개혁’에 사회 구성원들이 현혹될 때, 경제 지상주의의 하부구조는 더욱 강고해지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권위주의 독재사회에서 ‘시장 전체주의’ 사회로 가는 이행 정권이다. 육체를 억압하는 대신 정신을 좀먹는 자본의 독재, 부드러운 독재를 불러오는.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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