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6 18:46
수정 : 2005.02.16 18:46
도시에 살 때 늘 마음에 담아둔 곳이 설악의 계곡이다. 대학생이 되어 외지에 나가 사는 두 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도 설악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온가족이 백담사를 찾았다. 스님들은 동안거에 들어 있고, 사찰은 풍경소리처럼 한적했다.
용대리에서 차를 내려 계곡 길을 따라 두 시간을 걸어 들어가야 백담사다. 설 연휴동안 이 길은 외국인이 더 많았다. 이들은 왜 편리한 대도시를 두고 오지 백담사로 오는 것일까?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의 현대판 유배지를 보려는 호기심일까?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한국 불교와 설악의 자연을 보기 위함일 것이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매월당 김시습, 숭산 스님이 계셨던 곳이다. 한 강권 통치자의 삶과, 현실에 저항한 만해, 그리고 출세를 포기하고 세상을 조롱하며 산 매월당의 시비가 대조를 이루는 곳이다. 외국인들도 이런 백담사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백담사의 겨울 해는 짧지만 ‘느린 삶’을 일깨우게 했다. 일찍 저녁공양을 마친 우리 가족은 따뜻한 방에 앉아 얘기꽃을 피웠다. 문득 별빛이 궁금했다. 30여년 전, 그러니까 내가 딸아이의 지금 나이때쯤, 설악 계곡에서 야영하며 본 별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살며시 밖으로 나가 바라본 백담사의 밤하늘! 그래, 그 별빛! 수많은 별이 쏟아져 내릴 듯 가까웠다. 나는 방안에 있는 딸의 손을 잡아 끌어 하늘의 별과 계곡에 비치는 별빛을 보았다. 대학생이 된 아이는 난생 처음 보는 별빛이라 했다.
산사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얼핏 잠들었나 싶은데, 새벽 예불 목탁과 종소리가 들렸다. 문득 회한이 스쳐왔다. 아, 내가 얼마나 많은 것에 집착하며 살고 있는가, 이 욕망과 집착을 저 종소리와 함께 멀리 날아가게 할 수는 없을까.
단층 목조건물에 한지 바른 벽이 전부인 절방. 저만치 도회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우리 모두가 스님들처럼 버리고 사는 삶을 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태환경을 위해 수세식 화장실을 사찰의 ‘해우소’ 식으로 되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의 빠르고 편리한 삶을 포기하고, 느리고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백담사의 단층 목조건물과 밤하늘의 별빛이 대서울의 초고층 빌딩과 화려한 네온사인보다 좋은 것이란 증명은 없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문명이 길게 보면 인류에겐 재앙이란 점이다. 살충제가 좋은 예이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류의 위기는 그 살충제 때문에 생긴다. 사실 문명이란 소경 제 닭 잡아먹는 격일 수 있지 않은가. 도대체 발전의 기준이 무엇인가? 전국에 무수히 생겨나는 골프장, 효율 위주의 대규모 택지와 신도시 등이 발전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한강 주변에 초고층 아파트를 짓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결정인가?
꼭 필요하지도 않은 소유를 위해 사는 게 문명인이 아닐까. 백담사가 주는 이 텅 빈 충만을 현대인이 경험할 수 있다면, 경제도 많이 좋아질 것이다. 소비가 살아나지 않아 경제가 죽는다고들 하지만, 어디 그렇기만 한가. 빚카드를 신용카드라 그럴듯하게 이름붙여 소비를 부추기는 세상은 신용 불량자를 양산하고, 신용불량이 또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 악순환을 일으키지 않는가.
백담사의 하루는 짧으면서도 길었다. 아이들은 두고 온 친구들이 그리운지, 휴대전화조차 끄지 못했다.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란 딸들에게 현대문명의 편리함을 포기하도록 말해도 소용없을 터이다. 백담사에서의 하루가 먼 훗날 아이들의 삶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백담사, 그곳엔 파랗게 얼어붙은 겨울하늘을 배경으로 풍경소리가 은은함을 더하고 있고, 지금도 목탁과 새벽 예불 종소리가 잠든 영혼을 깨우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 백담사의 계곡에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산새들 소리처럼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정인화/관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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