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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1 18:29 수정 : 2005.02.21 18:29

올해도 새로운 학년의 업무를 위해 희망서를 작성하면서 경력을 보니 교사로서 일할 날보다 지나온 날들이 더 많았다. 더럭 겁이 났다. 20여년 동안, 교사인 나는 무엇을 했는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지은 죄는 없는가?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위로삼아 가면서 교육이 아닌 사육을 하지 않았는가?

작년 새학기가 생각난다. 2학년 담임을 임명받아 설레는 마음으로 1년을 함께 꾸려나갈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방학 동안 늑장부리던 생활을 깨고 서둘러 교실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새로 만난 친구들과 벌써 친해져 삼사오오 모여 열심히 수다를 떤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일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가 ‘안녕!’ 하며 크게 소리쳐 보지만, 아이들은 소 닭 보듯 한다. 썰렁해진 내 마음을 감추기 위해 눈이 마주치는 대로 학생들에게 말을 붙인다.

“어이! 살인미소 큰곰! 헤어스타일 멋진데! 그라고 원빈 닮은 대훈이, 새로운 선생님 만날 기대에 세수 세 번이나 했지? 꽃미남 영민이! 여자친구가 많아 고민이라고 신문에 났데? ”

이렇게 원맨쇼를 해서 아이들의 시선을 붙잡아 낯가림이 사라질 즈음 위로부터 각종 주문이 내려온다. 보충수업 실시, 야간 자율학습 실시, 모의고사 실시, 지각생 단속, 복장 단정, 각종 납부금 독려…. 아이들과 함께 아기자기하게 교실도 꾸미고, 기차여행도 하고, 철마다 하이킹도 하면서 정겹게 생활하고자 하는 꿈은 물거품이 되고, 담임교사와 학급 학생들과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학생들과 친밀감이 무르익기도 전에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등 꽉 짜인 일정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하루 24시간 중 14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점심시간을 비롯해 매 교시 이후 10분씩 쉬는 시간을 빼면, 12시간을 책상에 앉아 보낸다는 계산이다. 잠자는 시간 약 6시간, 학교 오가는데 2시간, 그러고 보면 집에서 보내는 시간도 2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인생의 밑거름을 다지는 중요한 시기에 아이들은 딱딱한 의자에 앉아 가족과, 자연 그리고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명문대 진학의 꿈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한다. 여름과 겨울방학이 있기는 하지만 학교마다 경쟁적으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하기 때문에 방학조차도 방학이 아닌 것이다.

허망하게 1년이 후딱 지나고, 명문대학에 진학한 선배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교과 우수상이 주어지고…. 이렇게 성공한 학생들을 본받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훈화말씀을 끝으로 종업식을 마치면, 교실에서 1년간 함께 생활한 아이들과 마지막 시간을 갖는다.

정말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진지하게 준비했건만, 아이들의 마음은 벌써 교문을 나가고 있다. 어떤 미사여구로 아이들의 마음과 교감할 것인가! 온갖 교육적인 미사여구로 마지막 헤어짐의 말을 한들 현실이 받쳐주지 못한 상황에서 아이들 마음에 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냥 딱 두 마디 했다.


“애들아. 수능 대박 내자! 그리고 우리 언제 어디에 있건 잘 먹고 잘 살자.”

“네” 하며 책가방 챙겨들고 허겁지겁 교실 문을 뛰쳐나간 후, 텅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준비한 내용을 크게 칠판에 써 보았다.

‘행복이란 출세나 재산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거야.’

문혜숙/장흥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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