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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21 18:33 수정 : 2005.02.21 18:33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공부 잘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무척 너그럽다. 공부만 잘하면 자기 방 청소를 제대로 못해도 공부하느라고 그랬다고 칭찬하듯 얘기한다. 아이들과 싸우거나 버릇없이 굴어도 공부 잘하는 녀석이 그럴 때는 다 이유가 있다고 주변에서 원인을 찾아 해명해 주고 감싸준다.

꼭 그만큼 우리 사회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푸대접한다. “공부 못하는 녀석이 청소도 제대로 못한다. 공부 못하는 녀석이 싸움질만 해댄다. 공부 못하는 녀석이 버릇까지 나쁘다”라고. 잘못한 그 일만 꾸짖어도 될 일을 굳이 공부와 연관시켜 죄(?)를 한껏 부풀린 다음 혼내 준다.

또 칭찬에 인색한 우리 사회가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만큼은 두 배로 칭찬을 한다. 공부도 잘하는데 그림도 잘 그린다느니, 공부도 잘하는데 노래까지 잘한다고 꼭 덤을 붙여 칭찬한다. 그런데 공부 못하는 아이가 잘한 일은 도리어 비난의 근거로 삼을 때가 많다. “만화를 저렇게 잘 그리니 공부를 잘할 수가 있겠어? 저렇게 노래를 부를 정도니 공부를 못하지”라고.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는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아이를 가르치고 기르는 일 중심에 아이는 없고 오로지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만 있다. 그래서 아이가 지닌 많은 특성 중 하나인 공부 잘하고 못함이 아이의 성장기를 좌우하는 잣대가 된다.

그런 현실이 내가, 우리 아이가 공부 못한다고 스스럼없이 인정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하늘이 내린 음치야. 아이구, 난 요리 못해. 연애 못하는 데 보태준 거 있어요?”라고 자신이 못하는 것을 편안하고 당당하게 밝혀야 스스로 위로가 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산다. 적어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은 걸려야 조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커밍아웃’을 한다. 공부 못하는 것이 금지된 영역을 침범한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얼마 전에 교육청이 위탁한 전문대학에서 홈페이지 제작 컴퓨터 연수를 받았다. 내가 배우기에는 조금 어렵고 힘든 내용이었다. 교사인 내가 공부 못하는 아이가 되어 열흘 동안 연수를 받으면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놀랍게도 칭찬과 위로였다. “공부 안 해도 돼요”라는 말이 아니라 “참 못하는데도 즐겁게 따라 오네요. 연수를 좀더 받으면 멋있는 홈페이지 만들 수 있겠어요”라는 말이었다. 교수님의 그 몇 마디가 늙은 학생의 향학열을 불지펴 주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아이들에게 골고루 칭찬하는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는, “공부 잘하는 네가 청소까지 잘한다면 더욱 좋겠구나.”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잘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란다.”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는, “네가 청소를 안 한 것을 보니 분명히 심오한 걱정이 있구나. 빨리 해답을 찾고 청소하기 바란다.” “네가 싸움을 잘하는 것을 보니 근력이 좋구나. 그렇지만 인내력도 길러야 한다”라고.

오금희/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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