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3 18:35
수정 : 2005.02.23 18:35
한때 이땅의 ‘문과생’들 중에 자연과학에 서툴고 과학기술로부터 정서적 거리를 두는 것을 은근한 자랑으로까지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과학은 너무나 멀리 있는 공상 비슷하고, 기술은 기름때투성이의 공장을 연상시켰다. 우리가 이룬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적에 가까운 경제 성장도 과학기술의 숨은 공로임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다. 선진국에서는 ‘과학소설’(SF)로 불리는 문학 장르를 굳이 ‘공상’이라는 말을 붙여 번역해낸 것도 이땅의 문과인들의 오만과 편견의 소치일 것이다. 근래에 와서 가속되는 ‘이공계 기피 현상’은 새삼 나라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린다. 산업, 기술 후진국의 지위에서 정신세계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는 이미 목가적 아름다움이나 빈곤과 무소유의 행복을 국민 전체의 가치관으로 주문하기에는 너무나 깊숙하게 자본과 기술의 삶 속에 몰입해 버렸다. 이제는 과학적인 일상 속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을 정면으로 탐색해야 할 것이다.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과학의 힘은 엄청나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과학기술 발전이다. 과학기술은 근대화의 상징인 합리성의 극대화로 인식되었다. 과학적 진보가 곧바로 사회 전체의 진보에 직결되었고, 과학기술을 수단으로 성취한 물질적 성공이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다시피 했다. 학문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는 것도 ‘과학적’ 성과였다. 합리성과 엄정성의 잣대가 더욱 강한 자연과학이 인문·사회과학을 압도했고, 따라서 어떻게 하면 자연과학의 수준에 접근시키느냐에 따라 학문 전체의 성패가 좌우되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신봉하는 근대 사회를 이루는 데 과학적 진보가 절대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와서 우리나라의 몇몇 선도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이룬 빛나는 성과 뒤에는 기술 개발에 투자한 공적이 깔려 있다. 코리아의 역대 대통령을 모두 합쳐도 단 하나 선도기업의 상호가 지닌 가치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도 있다.
과학기술의 시대와 함께 법의 시대가 왔다. 이제는 인간사회의 모든 갈등을 법의 문제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뿌리 내리고 있다. 과학기술 시대에 법의 소임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는 법의 체계에서 과학기술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법의 과제는 공동체 전체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흔들리는 “삶 전체의 예견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 법의 임무다. 누구의 말대로 법은 과학기술의 따뜻한 비단이불이 되어야 한다. 법이 수호해야 할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기계는 인간성의 적인가? 그렇지 않다. 미국을 조금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남북전쟁과 흑인노예 해방을 거론한다. 흑인노예가 해방된 이유가 무엇인가? 흑인 자신의 투쟁, 링컨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 기독교인들의 인간성에 대한 자각, 아니면 해방 노예를 노동력으로 확보할 북부 상공업자들의 경제적 이해, 저마다 내세우는 구구한 이유에 나름대로 일면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기계의 발명일 것이다. 지구상에서 노예제도가 사라진 것은 기계의 발명으로 육체노동에 의존할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법학의 두드러진 취약점은 과학, 기술에 낯설다는 것이다. 이제는 달라져야만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보이던 호주제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다. 헌법재판소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 내린 판결의 이면에는 자연과학자 전문가의 의견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후문이다. ‘사개추위’의 출발과 함께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논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것이다.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과학기술과 법을 접목하여 새 시대가 요구하는 공동체의 규범을 만들어낼 것이냐다.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 미국 샌타클래라 로스쿨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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