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24 18:43
수정 : 2005.02.24 18:43
일주일 전쯤인 지난 17일, 〈한겨레〉 편집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오후 4시가 넘어가자 텔레비전 주위로 몰려들었다.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이 한 유부녀와 함께 호텔방에 갇혀 곤욕을 치르는 장면이 〈와이티엔〉에 나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장면이 방영되자 텔레비전 주위에는 더욱 많은 이들이 몰려, 업무는 잠시 중단됐다.
편집국의 이런 풍경은 최근 대통령 탄핵심판과 행정수도 이전 위헌판결 선고 때나 있었다. 정형근 의원의 호텔방 소동이 그 정도의 뉴스 가치가 없는 것은 분명하나, 그에 비견되는 대중적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도 확실하다.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유명하고 힘센 사람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중의 속성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문제가 공인들의 사생활 보호는 어디까지이며, 국민의 ‘알 권리’는 어디까지냐는 언론의 고전적 명제이다.
나는 공인들의 사생활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쪽에 서고 싶다. 알 권리라고 하지만 요즘 문제가 되는 그런 사건들은 국민의 ‘알 권리’라기보다는 대중의 호기심 혹은 엿보기 심리에 편승한 언론들의 상업적 접근 탓에 빚어진 것이다. 정 의원이 호텔방에서 여인과 있었다는 것에 제삼자가 공익적 관점에서 개입해야 할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건 당사자들의 가족이나 관여해야 할 일이다. 이를 보도한 언론 쪽은 공인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차원에서 다뤘다고 한다. 하지만 소동은 정 의원이 아니라, 정 의원이 묵은 호텔 방문을 두들긴 남성이 피운 것이다. 정 의원으로서는 피해자다.
하지만 나는 지금 공인의 프라이버시나, 국민의 알 권리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언론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든 대중의 호기심이나 엿보기 심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사회가 그런 호기심이나 엿보기 심리를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다.
하나는 르윈스키 사건으로 몇달 동안 지지고 볶은 미국 사회처럼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혼외정사로 낳은 딸과의 만남을 보도한 잡지에 대해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고 반문하며, 그 잡지를 궁지에 몰아넣은 프랑스 사회다. 나는 단연코 우리 사회가 프랑스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미국 쪽을 닮아가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의 차이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나는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사회에서 불평등과 차별이 심할수록 대중들의 그런 엿보기 심리는 커지고, 사회에서 관용과 다원화 정신이 클수록 그런 엿보기 심리가 줄어든다고 짐작은 한다. 쉽게 얘기해서 대중들이 억눌릴수록 ‘힘센 놈들의 허약한 모습이나 빈틈’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정 의원 사건이나 요즘 문제가 되는 영화 〈그때 그 사람들〉도 같은 차원이다. 입만 열면 간첩과 반공을 부르짖던, 대한민국 국가 안보과 보수의 상징이던 정 의원이 호텔방에 갇혀 당황해하며 곤욕을 치르는 모습에 대중은 무엇을 상상했을 것인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권력의 화신들이 여대생과 여가수를 대동한 술자리를 밥먹듯이 즐기다가 결국 총질까지 해댄 코미디 같은 권력의 종말에 대중들은 어떤 감회를 느꼈을 것인가? 공무원 채홍사가 존재하고, 100여명의 미인들이 늘 대기한 사실을 ‘파트너 확실 보장, 미녀 수십명 대기’라는 싸구려 나이트클럽이나 룸살롱 광고전단 문구와 비교하며 대중들은 무엇을 생각했을 것인가?
대중은 분노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너희들도 별 수 없다’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대중은 그런 현실의 부조리에 절망했다기보다는, 그런 힘센 자들의 빈틈에 안도했을 것이다. 그런 카타르시스와 안도를 찾기 위해 한국 사회의 대중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그런 소재들을 찾고 있다. 아마 대중들이 그런 카타르시스와 안도가 더는 필요하지 않을 때에야 정형근과 ‘그때 그 사람들’은 대중의 입방아에서 사라질 것이다.
정의길 사회부 차장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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