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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01 18:40 수정 : 2005.03.01 18:40

영화배우 이은주씨의 자살은 우울증 때문인 것으로 일단 정리되는 모양이다. 한탄하는 형식을 빌려 각종 소문을 은근히 보도하는 야비한 언론 관행은 바뀌지 않았지만, 지난 몇년 동안 자살로 ‘화제’가 된 사람들과 비교할 때 그나마 괜찮은 대접을 받은 편이다.

“초등학생 성적 비관 자살”, “공부 힘들어 명문대 공대생 자살”, “사업 실패로 가족 동반자살”, “수능 비관 여고생 자살” 등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었던 자살 관련 기사의 자극적이고 단정적인 제목들이다. 이런 자살 보도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혀를 차며 이들의 죽음을 나름대로 진단하고,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우리 사회에 대한 처방을 내린다. 그야말로 자살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 분위기에서 그 ‘자살의 이유’를 처음 제시한 언론보도의 근거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능 때문에 자살했다고 보도되면 우리 모두는 너무나 쉽게 그들이 수능 때문에 자살했다 믿고, 사업 실패로 자살했다고 보도되면 우리는 또 너무나 단순하게 이를 받아들인다. 우리가 남의 ‘자살의 이유’를 이렇게 확신하는 것은 타당한가?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는 없다. 가족과 친지들에 따르면 그는 최근 무슨 문제로 고민해 왔다고 한다. 경찰은 사망자가 그 문제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보고 조사를 계속 중이다.” 이상은 우리에게 ‘자살의 이유’를 알려주는 언론보도의 기본 틀이다. 하지만 유서가 없는 이상, 가족들의 이야기도 그저 추측에 불과할 뿐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이은주씨처럼 유서가 있어도 여전히 ‘자살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한번이라도 자살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동네방네 자신의 고민을 알리며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혼자 고통을 삭이며 죽음을 준비한다. 죽음을 선택해야 할 정도로 괴로운 사연은 남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이야기인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사자에게는 그렇다. 따라서 분신 노동자들처럼 죽음을 통해서라도 마지막 발언의 기회를 얻고자 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우리가 ‘자살의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경우란 없다고 봐도 좋다. 성적 때문이라고 보도된 학생이 실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자살했을 수 있고, 사랑 때문이라고 보도된 청년이 실제로는 부모의 학대 때문에 목숨을 끊었을 수 있다. 흔한 경우는 아니겠지만 경찰과 언론에 ‘자살의 이유’를 알려 준 가족, 친지들이 바로 그 자살의 직접적 원인일 수도 있다. 우울증처럼 질병에 의한 자살이나, 자살자 자신조차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 없는 자살’도 적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보고서를 작성하며 ‘이유’ 칸을 채우기 위해 고심 끝에 찾아내거나 만들어낸 이야기들이 기자들의 관심을 끄는 순간, 그럴듯한 ‘자살의 이유’로 무장한 객관적 기사 하나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보도에 분석이 따라붙고 전문가들의 장황한 진단과 대책까지 제시되고 나면, 어느새 추측에 불과하던 (또는 처음부터 확인 불가능하던) ‘자살의 이유’는 확정된 사실로 둔갑하게 된다. 두어 건의 비슷한 자살을 묶어 보도하면 확실성은 배로 늘어난다. 그래서 입시철 근처에 자살한 중고생은 모두 학업을 비관해 자살한 것이 되고, 장애인이 자살하면 예외 없이 장애와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닌데도, 천편일률적으로 생산해낸 ‘자살의 이유’를 통해 언론은 자기들이 평소 하고 싶던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늘어놓을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불명확한 ‘자살의 이유’를 단정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통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올바른 언론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그 ‘자살의 이유’를 알 수 없다. ‘자살의 이유’는 궁극적으로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닌 까닭이다. 말없이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침묵을 존중해 주는 것도 ‘인간에 대한 예의’다.

김두식/한동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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