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03 18:51
수정 : 2005.03.03 18:51
우리나라를 선진경제로 한단계 끌어 올리고 자본시장의 새로운 원년을 만들 수 있는 개혁이 실종 위기에 처했다. 1996년 이후로 십여년 수많은 논쟁과 우여곡절 끝에 마련된 증권 집단소송제가 시행되려는 순간에 다시 2년 유예된 것이다. 공정거래법 개정에 이어서 정부와 정치권이 다시 한번 재계의 로비와 발목잡기에 항복하고 말았다. “선진경제를 하려면 투명하고 공정한 선진사회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 노 대통령의 취임 두 돌 국정연설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다.
경제와 관련된 개혁정책이 표류할 때마다 정부와 여당이 들이미는 변명거리가 있다. 하나는 ‘경제가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스템 리스크’라는 것이다. 경제가 어려우니 경제개혁을 미루자는 주장은 노무현 정부 출범 때부터 지난 2년내내 들어온 지정곡이다. 경제개혁이 경제를 어렵게 만든다는 모순된 주장을 더는 반박하고 싶지 않다. 다만 경제가 좋아지면 경제개혁을 하겠다는 것인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시스템 리스크란 당장 임시방편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시장이 무너질 것이니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한다는 것이다. 신용카드회사 처리 이후로 관치경제의 칼을 휘둘렀던 경제 현안들을 시스템 리스크로 규정한 정부의 근시안적 판단에 대해서도 논쟁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임시방편을 취한 이후로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는가를 묻고 싶을 뿐이다.
증권 집단소송제를 연기하면서 정부는 “경기가 나빠 분식을 털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한두 건이라도 소송이 발생하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또다시 경기침체와 시스템 리스크의 변명을 한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실용주의라는 새로운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시장경제의 원칙을 지키고 기업을 바로 세우는 제도를 반실용주의로 내모는 것도 황당하지만, 개혁을 미루고 원칙에 어긋나는 정책을 쓰면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미신을 아직도 믿고 있는 경제관료들과 정치인들에게 경제위기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를 묻고 싶다. 증권 집단소송제를 연기하면서 정부는 2년 이내에 과거 분식을 해소하면 법 적용에서 제외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앞으로 잘하기 위해서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이 실용적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한다. 과거의 잘못과 새로운 잘못을 구분할 능력을 정부가 가지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제도적인 장치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유예조처는 두 가지를 다 갖추지 못해서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재벌들은 과거에도 여러번 관용의 은전을 받았지만 같은 잘못을 반복해 왔으니 제도적 장치 없이 말로 되풀이한 재계의 약속은 공수표일 뿐이다. 또한 과거 분식과 새로운 분식을 구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쉽게 비유하자면 솔밭에 바늘 하나를 던져놓고 찾을 수 있느냐고 할 때에 솔잎과 바늘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금융기관 한 곳의 경영을 실사하기 위해서 수많은 회계사들을 수개월 동안 투입하는 것이 현실이고, 신용카드회사의 부실에서 드러난 것처럼 상시감독 체제를 갖추고 있는 금융기관의 경영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정부 능력의 한계다. 최근에 삼성생명이 검사를 방해하려고 전자문서 6만건을 삭제했을 때에 금감원은 같은 삼성계열사인 삼성에스디에스에 의뢰해서 2만건을 복구한 것 이상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현실이 이러한데 처음부터 증빙서류조차 조작되어 이루어진 과거 분식을 정부가 구분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실용주의의 극치다.
시장경제에서 실용주의의 근본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의 떼쓰기와 반발에 밀려서 시장원칙을 거스르고 공정경쟁을 위한 경제개혁을 미루는 것은 정부의 자신감 부족이거나 정치적 야합이지 실용주의가 아니다. 정부와 여당이 내세운 실용주의가 새로운 변명거리가 아니라 남은 3년 동안 경제개혁을 통해서 한국경제를 투명경영과 공정경쟁이 이루어지는 선진경제로 이끄는 진정한 실용주의가 되기를 바란다.
장하성/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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