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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11 18:38 수정 : 2005.03.11 18:38

일찍이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 나라의 민족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서구 부르주아지의 타락을 추구한다”라고 저개발국에서는 진정한 부르주아지를 찾아볼 수 없고,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신분, 옛 식민지 권력이 베풀어주는 몫을 받아먹는 데 혈안이 된 비열한 계층만이 존재한다… 이 졸부 중간층은 위대한 이념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고 창의성도 없다”라고 식민지 부르주아의 타락상을 질타한 바 있다. 최근 한승조 교수의 ‘식민지 축복론’을 들으면서 파농의 이 말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파농이 말했듯이 식민지를 경영한 모국의 우익 혹은 부르주아는 문명을 일으키고, 예절과 학문과 문화를 자랑했지만 식민지 부르주아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리고 전자는 자기 민족과 국가를 일으켜 세우려는 나름대로의 애국심이 있었지만 식민지 부르주아는 사적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고 백성을 팔았다는 점에서 양자간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전자는 고상한 방식으로 물질을 추구했지만, 후자는 오직 정신은 사치이며, 전통은 쓸모 없고, 힘만이 진리라고 떠벌린 점에서 차이가 있다. 후자는 자신들에게 물질과 지위를 가져다준 모국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요 대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족이 제국주의를 비판하면 이들을 마치 원수처럼 여기면서 탄압에 앞장섰다. 군대, 경찰, 돈다발, 그리고 모국 언어의 구사능력이 이들 식민지 부르주아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며, 자신의 허약한 교양과 문화수준을 욕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그들을 매장시키기 위해 형법, 국가보안법, 계엄령, 긴급조치 등을 서슴없이 발동하였다.

과거의 친일세력에서 오늘의 ‘식민지 지배 축복론’까지 일관된 논리가 있다면 바로 사익의 추구, 외형적인 경제성장, 혹은 물질이 최고 중요하다는 신념이다. 그래서 사익보다는 공익을 내세운 사람을 모두 위험한 불순분자, 혹은 ‘빨갱이’로 간주하였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물질을 최고로 여기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식민지 모국의 부르주아는 언제나 시민들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교육,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으며, 실제로 부르주아들 자신이 자선, 기부, 납세, 병역의무 이행 등의 방법으로 공익을 추구하는 솔선수범을 보였다. 그러나 식민지였던 나라에서는 그런 부르주아를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렵다. 자식들 군에 안보내고 애국 운운하고, 요지에 땅 사두어서 막대한 부를 챙겨놓고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 운운하고, 뒤로는 편법과 탈법을 자행하고도, 법치와 질서 운운하니 이를 알아챈 국민들이 그들이 말하면 비웃음만 보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옛날의 사대부는 “세상이 걱정하기 전에 먼저 걱정하고, 세상이 기뻐한 후에 기뻐하는 것”을 큰 덕목으로 여겼다. 비록 조선시대의 모든 사대부가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 시절에 후대에 귀감이 될 만한 많은 관리, 정치가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근대 지난 근대 백년 동안은 단절의 시기였다. 근대 이후 우리의 부르주아, 관리, 정치가들은 학식과 공직의 지위를 통해 얻는 지식을 세상 걱정하면서 대안 제시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혼자 기뻐했다.

일본이 물러간 지 60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정신은 아직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들이 심어놓은 부르주아는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을 움직여 왔다. 한승조 교수의 발언은 바로 탈식민화 물결에 대한 식민지 부르주아의 위기의식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거리를 메우고 있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구호는 노동자와 시민이 부르주아를 존경할 때 가능하다. 부자와 공직자가 세상 사람의 모범이 되는 나라, 그러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과거청산 작업은 더욱 철저하게 추진되어야 하며, 새 지도층을 육성해야 한다.

김동춘/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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