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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2.31 19:11 수정 : 2012.12.31 19:11

윤석천 경제평론가

시간은 어김없다. 쌓이는 눈 속에 또 한 해가 묻혀간다. 시간은 그렇게 끊임없이 흐른다. 하나, 우리네 삶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한쪽은 우는데 다른 쪽은 웃는, 코미디 같은 세상도 여전하다. 철탑 위에선 사람들이 울부짖는데 다른 쪽에선 승리한 자들의 웃음이 눈발처럼 난무한다. 소통과 대통합을 외치지만 행동은 그 반대다. 너와 나는 다른 행성의 사람일 뿐이다. 너는 더 이상 소통 대상이 아니다. 네가 죽는 건 나랑 아무 상관없다. 너희끼리 목소리 높이고 열내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거라는 생각이다. 경멸을 넘어 무시가 고착화된 세상, 그건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날이 뚜렷해진다.

박근혜 당선인의 행보는 많은 걸 시사한다. 성탄절을 전후해 쪽방촌을 찾아 직접 도시락을 만들고 배달을 하며 봉사활동을 했다. 사랑으로 충만한 당선인이다. 하지만 그 발걸음이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마뜩잖다. 왕이 백성을 ‘긍휼히’ 여겨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보여서다. 반항할 힘도 없는 절대 약자는 찾지만 저항하는 자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차가움이 엿보여서다. 혹 “반항하지 마라. 저항하는 자에겐 국물도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행보일까 걱정이다. 진정으로 소통과 통합을 원한다면 농성장의 노동자를 찾았어야 했다. 통합이란 결국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을 껴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를 포용할 때 그것이 진정한 통합이다. 저항 불가능의 한계선상에 있는 사람을 보듬어 안는 건 돌봄이지 통합이 아니다.

당선인은 철탑 위의 사람들을 노동자로만 보는 게 아닐까. 그것도 자본가와 자본주의에 대적하는 개념으로서의 노동자로만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통합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노동자 이전에 누군가의 아들딸이자 아비어미이다. 남편이며 처다. 그들은 우리다. 결코 다른 별나라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들의 눈물과 탄식, 외침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될 때에야 그들의 아픔이 내 것이 되고 우리 것이 된다. 비로소 통합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란 메를로 퐁티의 말은 불편하지만 사실이다. 인간의 폭력성은 생명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먹어야 한다. 이는 다른 그 무엇은 죽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뿐인가. 우리의 삶 대부분은 누군가의 것을 가져오는 데 쓰인다. 욕망을 채운다는 건 타인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한다는 얘기다. 그나마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우린 폭력을 최소화할 수는 있다. 단,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상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취약한 존재란 사실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인간이 야수와 다른 점은 전혀 없다. 철탑 위의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공감이 가슴에서 울릴 때 비로소 우린 짐승이 아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선현들이 시간을 분절시켜 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마디마다 새로운 시작을 하라는 의미일 게다. 우린 오늘 새로운 마디에 서 있다. 이제 출발해야 한다. 하나, 철탑 위 그들, 아니 우리를 남겨둔 채 섣불리 새로운 시작 혹은 희망을 얘기할 수는 없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무시와 경멸이야말로 엄청난 폭력이다. 이제 그 폭력을 적어도 최소화해야 한다.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그 원인이 뭔지는 알려고 애써야 하는 거 아닌가.

내리는 눈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온 천지를 감싸안는다. 그게 포용이라고 가르친다.

이 눈이 부디 새 출발의 서설이기를.

윤석천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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