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에는 정치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봉쇄됐다. 대학가에는 정치구호가 사라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도 사라졌다. 강력한 공포정치가 사회 전반을 지배해 온 것이다. 97년 덩샤오핑의 타계 사실이 알려진 그날, 천안문 광장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광장에는 연을 날리는 사람과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로 평화로웠다. 그리고 대다수 베이징 시민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한 시민은 “그 노인은 이미 죽은 사람이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라고 말했다. 정치적 자유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들은 천안문 학살의 주역에 대한 반감을 무관심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뒤 자오의 죽음에 대해선 진한 추모의 감정을 드러냈다. 비록 천안문에 모여 공개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했으나 그들은 빈소의 소자보를 통해 “당신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며 장례를 13일 동안이나 지체시켰다. 후진타오의 현재 집권층으로서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이전처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엑스포라는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러야 하는 마당에 국제적인 압력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경제 성장을 앞세운 채 ‘정치적 자유 없는 민주화’라는 중국 나름의 독재체제는 자오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도전받고 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돈과 배경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분위기, 그리고 ‘당’이 여전히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정하면서 스스로 ‘시장’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이 중국 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결국 자오의 유골은 혁명공원묘지에 안치되지 못하고 속세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죽은자에 대한 또다른 연금이 시작됐다. 자오는 저승에 가고서도 ‘연금 사슬’을 끊지 못했지만 인민들 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세상이 오는 것을 기다릴 수 있어 만족할지 모른다. 이길우 편집기획부장nihao@hani.co.kr
칼럼 |
자오, 니하오? |
그러나 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에는 정치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봉쇄됐다. 대학가에는 정치구호가 사라졌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도 사라졌다. 강력한 공포정치가 사회 전반을 지배해 온 것이다. 97년 덩샤오핑의 타계 사실이 알려진 그날, 천안문 광장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광장에는 연을 날리는 사람과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로 평화로웠다. 그리고 대다수 베이징 시민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한 시민은 “그 노인은 이미 죽은 사람이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라고 말했다. 정치적 자유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들은 천안문 학살의 주역에 대한 반감을 무관심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뒤 자오의 죽음에 대해선 진한 추모의 감정을 드러냈다. 비록 천안문에 모여 공개적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했으나 그들은 빈소의 소자보를 통해 “당신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며 장례를 13일 동안이나 지체시켰다. 후진타오의 현재 집권층으로서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를 이전처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엑스포라는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러야 하는 마당에 국제적인 압력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경제 성장을 앞세운 채 ‘정치적 자유 없는 민주화’라는 중국 나름의 독재체제는 자오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도전받고 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자본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돈과 배경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분위기, 그리고 ‘당’이 여전히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정하면서 스스로 ‘시장’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이 중국 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결국 자오의 유골은 혁명공원묘지에 안치되지 못하고 속세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죽은자에 대한 또다른 연금이 시작됐다. 자오는 저승에 가고서도 ‘연금 사슬’을 끊지 못했지만 인민들 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세상이 오는 것을 기다릴 수 있어 만족할지 모른다. 이길우 편집기획부장nihao@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