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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8 18:24 수정 : 2019.10.29 14:16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슈논쟁/인터넷 악플 규제]

지난 14일 가수 겸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25)의 죽음을 계기로 인터넷상의 악플(악성 댓글)로 인한 피해의 심각성이 거듭 환기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어 25일에는 카카오가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연예뉴스의 댓글창을 없애고 인물 관련 검색어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더 이상 악플로 인해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사회적 공감대가 커지고 있는 데 비해, 구체적인 해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인터넷상의 혐오 표현 등에 대한 규제 강화 여부를 두고선 찬반이 엇갈려왔다. 아래에 두 언론학자의 견해를 나란히 싣는다. 이재진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등 실효성 있는 규제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억압적 규제 대신 표현의 자유가 실체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법을 찾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강조한다.

젊은이의 때 이른 죽음은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안타까움과 애도를 넘어선 고통스러운 자책과 성찰을 낳는다. 젊음을 보호하지 못하는 공동체란 쇠락을 넘어 타락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설리의 죽음을 놓고 우리 사회에 반성이 크게 일고 있다. 나도 반성에 동참한다.

그런데 상실감과 자책이 지나쳐서 그런가, 반성이 반동이 되고 애도가 분노가 되려 한다. 그의 죽음을 초래한 결정적 원인과 작은 이유들을 확인하기도 전에 죽인 자부터 찾아나서고 싶다. 둘러보니, 나만 이런 게 아니다. 오래된 규제론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고, 제 길을 가던 처벌주의자들이 연장을 고쳐 쥐고 돌아온다. 그리고 성난 얼굴로 묻는다. 설리를 죽인 자가 누구냐.

우리나라에서 인터넷 표현의 자유는 더디지만 착실하게 제 길을 찾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02년 인터넷에서 ‘불온통신’을 규정하고 금지했던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 제1항을 위헌이라 판결했다. 공공의 안녕 질서나 미풍양속을 해한다는 식의 불명확한 이유로 정부가 인터넷 내용물을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헌재는 판결문에서 이미 중요한 표현 매체로 작동하고 있는 인터넷을 ‘질서 위주로’ 규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달기도 했다.

헌재는 또한 2012년 이른바 ‘인터넷 실명제’, 정확히 말하자면 ‘일정 규모 이상의 사업자에게 본인확인제도를 운영할 것을 강요하는 법’을 위헌이라 결정했다. 이 판결에서 헌재는 우리나라 인터넷 환경이 이미 충분히 규제적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이런 조건에서 인터넷 이용자의 활동을 위축하는 본인확인제도를 유지하는 일은 과도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인터넷에 불법 내용물을 게시함으로써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와 같은 구체적인 피해를 유발한 가해자를 얼마든지 찾아서 처벌할 수 있다. 경찰의 사이버 수사대는 치밀하고 유능하며, 언제든지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할 자세를 갖추었다. 오히려 열정적으로 고발을 남용하는 자들이 문제다. 모욕죄나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와 같이 위헌적 요소가 다분한 형사처벌 조항을 이용해서 인터넷상 비방, 욕설, 거짓말을 처벌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우리는 또한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와 같은 직접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불법성이 명백한 표현물에 대해서 포털 사업자가 예방적으로 임시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포괄적인 사적 통제를 허용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갑돌이가 갑순이를 명예훼손하거나 모욕한 사실이 인터넷 포털에서 이루어졌다면, 해당 명예훼손 내용물을 게시한 포털 사업자가 법적 책임을 나누어져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있다. 인터넷 매개자가 자기 영역 내의 표현물을 관리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 나라는 이미 인터넷 발언의 자유를 촘촘하게 규제의 망으로 옭아 놓은 나라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형사처벌 카드를 꺼낼 수 있다. 포털이나 게시판 운영자와 같은 인터넷 매개자도 내용물 규제에 참여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일단 인터넷 매개자가 이용자의 게시물을 분류하고 삭제하고 이용을 통제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이른바 ‘부작위에 의한 불법행위’를 범하는 셈이며, 따라서 처벌받는다. 그런데 인터넷 매개자가 일을 열심히 해도 문제다. 사법기관도 아니면서 공론의 장에 유통하는 발언의 내용을 사실상 규제하는 셈인데, 이런 일을 제대로 하는지, 반대로 얼마나 편파적으로 하는지 누구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한 포털 사업자는 연예 기사 댓글 공간을 없애는 등 특단의 조처를 준비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마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정부의 규제도 염려지만, 역시 애도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시민들의 반응이 언제 증오로 변해 자기에게 덮칠까 두려워 나온 대책일 것이다. 포털이 왜 그런 자해에 가까운 조처를 고려하는지 모를 바도 아니지만, 역시 안타깝다. 만약 이런 불행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문제가 발생한 인터넷 공간을 없애는 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 어디 남아날 곳이 있을까 싶어서다.

진짜 문제는 이런 대증적이고 고식적인 대응 때문에 사태가 개선되기는커녕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일단 남을 헐뜯고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댓글 공간이 아니더라도 갈 곳이 많다. 또한 인터넷 댓글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상업적 이득을 얻으려는 집단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들 역시 국내 포털이 아니더라도 남용할 만한 공간과 수단이 많다. 결국 창의적이고 기술적인 방식으로 인터넷 공간을 관리할 역량을 갖춘 매개자가 손을 놓은 공간에서 악당들은 더욱 활개 친다.

설리의 죽음을 애도하며, 누가 죽였냐고 묻기 전에 왜 그래야 했는지 물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악성 댓글에 맞대응하며 발언의 자유를 실천했던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가 허울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보장된 사회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설리와 같이 당당했던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일찍 절망하는지, 그들의 저항과 절망의 목소리는 어떻게 외면당하는지 우리는 역시 부지런히 묻고 답해야 한다. 인터넷 공간은 이런 고난과 투쟁, 고통과 도움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 설리의 죽음을 억압적 규제의 핑계가 아닌 더 많은 자유를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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