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12 18:13
수정 : 2019.11.13 02:39
이원재 ㅣ LAB2050 대표
아이 학교 공개수업을 참관했다. 국어시간에 여고생들이 인생그래프를 그려냈다. 100살까지 어떻게 살지를 발표하면서 아이들은 깔깔댔지만,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조금 아팠다. 여러 아이들이 졸업 뒤에도 ‘돈 버는 기간’을 넣어뒀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은 종종 마흔 너머로 미뤄졌다. 십대들의 미래 설계에 묻어난 소득 불안이 교정을 떠난 뒤에도 자꾸 떠올랐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섰는데도, 여전히 최소한의 소득 보장이 우리 사회의 화두다. 생계가 끊길까 불안해 움츠러들고, 생계가 끊겨서 비극을 맞는다. 우리나라가 식민 지배와 전쟁과 저임금 장시간노동을 견디면서 만들고 싶었던 사회는 기껏 이 정도까지였을까? 지난 8월 서울 봉천동에서는 40대 엄마와 여섯살 어린이가 굶어 죽은 채로 발견됐다. 여러 복지제도가 있지만 복잡한 조건 탓에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평생소득이 불안한 청년들은 공무원시험에 몰려 줄을 선다. 양육비 부담이 사상 최악의 저출생을 불러왔지만, 아동수당은 여전히 쥐꼬리다. 극심한 노인빈곤으로 불안해하면서도, 노후연금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청소년들이 꿈을 미뤄두겠다는 것은 개인의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다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난다. 꿈꾸고 모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혁신이 이뤄지면서 전체 소득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움츠러든 사회에서는 소득도 움츠러들게 되어 있다.
사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요즘 내놓는 여러 가지 복지정책과 수당제도는 우리의 소득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구직 청년에게는 구직촉진수당이 나가고, 취업 뒤에는 내일채움공제 등의 소득보조정책이 들어간다. 저소득 근로자를 대상으로 지급하는 근로장려금(EITC) 예산은 4조9천억원까지 확대됐다. 서울시는 기존의 청년수당을 확대해 10만여명까지 대상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일정한 소득 이하의 청년들은 대부분 6개월 동안 월 50만원의 수당을 받도록 해주겠다는 취지다. 경기도는 청년기본소득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24살 청년에게 연 100만원을 지급한다. 경기도는 농민기본소득도 도입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농가에 직접 소득을 지급하는 농민수당은 강원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등도 도입을 추진 중이다.
시민사회에서도 다양한 정책 제안이 나온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등 16개 단체는 오는 22~23일 ‘2019년 한국 기본소득 포럼’을 대규모로 연다. ‘농민기본소득추진 전국운동본부’ 결성도 추진되고 있다. 랩(LAB)2050은 2년 뒤면 실현 가능한 재정모델을 짠 국민기본소득제를 발표했다.
정치권에서도 ‘기본소득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자유한국당 산하 여의도연구원은 기본소득의 한국형 모델을 논의하기도 했으며,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은 최근 강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기본소득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녹색당과 미래당은 당론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기본소득당 설립도 추진되고 있다.
새로운 정책을 다양하게 토론하며 시도해보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정책이 복잡하고 다양한 상태에서 고착되면 곤란하다. 각각의 제도를 관리하는 데는 각각의 행정 비용이 발생한다. 제도 하나마다 정부 조직도 공무원 수도 늘어나게 되어 있다. 선별하고 분류해야 하는 제도일수록 더 그렇다. 게다가 복잡해질수록 정작 혜택받아야 할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려워지고 소외받기 쉽다. 지방자치단체별로 다른 제도를 운용하면서 지역주민들 사이에 벌어지는 형평성 논란과 갈등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제 정리할 때가 됐다. 지역과 영역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 복잡한 수당제도를 조건 없이 지급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제 형태로 정리하고, 재원을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합리적으로 마련하며, 국민들의 공론의 장을 마련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기본소득제는 오늘의 소득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기본소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전국민이 함께 아이들의 미래를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부와 민간이 함께 국가기본소득위원회를 만들어 이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토론이라도 시작하고 나서 아이들에게 말을 건네자. 이제 마음껏 꿈을 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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