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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8 18:09 수정 : 2019.12.19 16:46

이라영 ㅣ 예술사회학 연구자

많은 이들이 말하듯, 현자의 시대는 갔다. 나는 감히 판단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나보다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렇게 진단한 지 오래다. 현자가 없어 애석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인데 언어는 망가지고 있어 안타깝다.

검색과 에스엔에스 사용만으로도 ‘공부한다’는 착각을 하기 쉬운 시대를 살아간다. 정보에 대한 욕망은 충만할지 모르나 생각하기에 대한 의지와 욕구는 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아는 척’하는 인간을 위한 지적 서비스 아이템이 차고 넘친다. 오늘날 비평가란? 정보 소비자인 대중에게 지적 서비스를 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친절한 제품 설명서처럼, 지식과 정보의 친절한 안내자이며 유쾌한 대담자가 되어야 한다. 대중의 언어로 쉽게 전달하여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사람이 대중이 못 알아듣는 말을 했을 때 그 ‘서비스’는 지탄의 대상이 된다. 대중을 무시해? 언어 영역 1등급인 사람도 모르는 말을 쓰다니! 고객만족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는 언어는 그렇게 시장에서 지탄받는다.

올해 한 영화평론가의 어휘 선택(명징과 직조)을 둘러싼 반응과 담론이 그리 가볍게 보이지 않았다. 어려운 한자어를 썼다고 문제 삼았지만 정말 ‘어려운’ 단어라서 문제였을까. 일상에서 사람들의 언어를 관찰해 보면 티브이 뉴스와 신문을 비롯하여 인터넷에 등장하는 언어를 빠른 속도로 흡수한다. 예를 들어 예비타당성조사의 줄임말인 ‘예타’를 일상에서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016년 하반기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농단’이라는 언어를 배웠다. 요즘은 ‘포렌식’(forensic)이라는 어휘를 뉴스에서 자주 접한다. 디지털 기기를 통해 각종 전자적 증거물을 수집, 분석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언어들을 두고 ‘어렵다’고 하는 경우는 거의 못 본다.

이는 단지 대중적인 말과 어려운 단어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인싸’의 언어라면, 적극적으로 익힌다. ‘뜨아’와 ‘아아’가 무슨 말인지 척척 알아들으며, 톱다운, 스몰 딜, 김정은과 트럼프의 ‘케미’ 등의 외국어가 뉴스를 도배해도 아무도 이 언어에 이의제기 하지 않는다. 이런 언어를 재빨리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가 밀려나고 어떤 언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어려운 단어에 대한 저항감에 비하면 혐오 표현이나 잘못된 수사는 오히려 만개한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 미치코 가쿠타니는 특정 패거리의 언어가 국민의 언어가 되는 것, 곧 차별적인 언어가 주류가 되어 정치 담론으로 들어오는 문제를 지적한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의 언어에서 정확히 이와 같은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지난 5월 정치적 공격을 위해 과하게 비속어를 사용했던 나경원 의원은 “인터넷상의 표현을 무심코 사용”했다며 사과했다. 그가 뜻을 알았느냐 몰랐느냐보다 ‘인터넷상의 표현’을 그냥 썼다는 점이 중요해 보였다. 아마 나름대로는 ‘쉬운 대중의 언어’를 쓴다고 착각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막말 때문에 구설에 여러 번 오른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인상적인 항변을 기억한다. 그는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내 정치를 할 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며 작년에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막말을 변호한 적 있다. 매우 격이 떨어지는 언어, 나아가 차별적인 혐오 발화조차 ‘대중친화적’이라는 구실로 정당화한다. 이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정제된 언어는 마치 엘리트의 잘난 척처럼 보인다. 예의가 위선과 동일시되듯이 막말은 마치 구수한 서민의 언어인 양 되어 버린다.

황교안 대표는 얼마 전 기자회견을 통해 “공수처는 독일 나치의 정치경찰인 게슈타포가 될 것”이라 했다. ‘좌파독재’라는 언어를 사용하던 그는 이제 ‘나치’와 ‘게슈타포’의 의미도 바꿔 나가고 있다. 웃을 일이 아니다. 쉽지만 잘못된 말, 의미가 텅 빈 화려한 수사야말로 경계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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