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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26 18:06 수정 : 2019.12.27 02:07

세밑에 이렇게까지 무거운 어떤 가족사를 꺼내들 생각은 아니었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넓은 어깨를 흔들며 청와대를 나서는 화면과 여의도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국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화면이 생각지 않은 순간 어떤 다큐 화면들을 불러냈다. 그렇게 다큐 속 두 가족의 70년도 소환했다. 일력 몇 장만 넘기면 한국전쟁 발발 70년이라는 사실도 작용했을 것이다. 칼럼 마감은 성탄절 아침이고 성탄절을 앞두고 한반도는 운명의 한주를 맞고 있다는 내외신 기사가 쏟아지는데 ‘이런 이야기’를 치는 손이 무겁다.

첫번째 이야기는 몇주 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보게 된 박경태와 김동령 감독이 공동 연출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라는 다큐의 주인공 ‘인순’ 아주머니의 가족사다. 한국전쟁 당시 고아로 버려져 서울역 근처를 떠돌다 성폭행을 당했고 생리 시작 전부터 성을 파는 일을 시작해야 했던 인순 아주머니는 양동이 철거되면서 소년원과 서울역을 거쳐 파주 용주골 기지촌으로 갔다. 포주가 이름도 호적도 만들어 주었다. 닉슨 독트린으로 파주 미군기지가 축소되자 의정부의 뺏벌이라는 막장 기지촌으로 밀려갔다. 베트남 파병 미군이 한국에 재배치되는 그때 언제쯤 마약에 취한 흑인 병사와 인순 아주머니가 만났다. 동거에 들어갔고 딸을 낳고 배우자 비자로 시카고에 건너가 아들도 낳아 언뜻 기지촌 여성의 로망을 실현한 듯했다. 그러나 곧 남편의 폭력과 몸을 팔아서라도 마약 살 돈을 마련해 오라는 요구에 도망치듯 뺏벌로 되돌아왔다. 돌아오는 여비는 날씨 좋은 하와이 미군기지 주변 바닷가에서 노숙하며 뺏벌에서 하던 일로 모았다.

인순 아주머니는 ‘두레방’이라는 여성단체에서 진행하던 미술 치료 프로그램에서 박 감독을 만나 20년 넘게 박 감독의 기지촌 다큐 주인공이 되었다. 박 감독의 첫 다큐 제목은 <나와 부엉이>인데 인순 아주머니의 그림 제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도 그의 그림 제목이다. 인순 아주머니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에서 스스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서사를 연기한다. 자신을 학대하고 치욕과 고통을 안겨준 전남편의 목을 자른 후 남편의 목을 새끼줄로 묶어 마치 저승 여행에 길동무라도 되는 양 끌고 다니는 그로테스크한 서사 속에서 임신한 나무가 되었다가 전남편을 표상하는 도깨비가 되기도 한다. 그는 읽고 쓸 줄도 숫자나 연도 같은 것도 잘 모른다. 삶 자체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선글라스 낀 각하’가 살아 있을 때 미국에 갔고 뺏벌에 돌아와 어느 날 화면에서 ‘대머리 대통령’을 봤다고 말할 때 그가 산 어떤 시기를 가늠해야 한다.

나는 다큐 밖의 인순 아주머니 가족사를 더 따라가 보았다. 40년간 연락 한번 없었던 인순 아주머니 자녀들의 거처를 박 감독이 수소문해 찾아내었고 인순 아주머니와의 극적 해후도 주선할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치며 미국에 다녀왔다. 그 얘기는 아직 다큐가 되지 못했다. 인순 아주머니의 딸은 시카고 빈민지역 공공 아파트에 살고 있고 미국 서브프라임 금융 위기 때 신용불량자가 되어 여권을 받기도 쉽지 않고 초청에 응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낮에는 네일숍에서 일하고 밤에는 우버 택시 알바를 뛴다. 인순 아주머니의 손주들은 시카고 빈민지역에서 비교적 반듯하게 자라고 있었다. 어쩌면 인순 아주머니는 딸보다는 손자와 먼저 만날 수도 있다. 미군에 지원해서 한국 근무를 자원한다면.

인순 아주머니 가족사는 내가 만들고 있는 다큐의 정 할머니 가족사와 곳곳에서 겹쳐졌다. 인순 아주머니의 딸과 정 할머니 손녀가 마흔세살 동갑이라는 우연만은 아니다. 내가 정 할머니를 만난 것은 1986년 사당동 철거 재개발 현장에서였다. 그때 열살이던 정 할머니 손녀를 중심에 두고 그 가족의 33년을 다루는 영상을 편집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 가족의 70년을 따라가고 있었다.

정 할머니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 월남했다. 월남하는 도중에 혼자가 되었다. 20대 중반이었다. 남매를 데리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서울 수복 후 용산역에 내려 그때부터 판자촌을 전전했다. 닥치는 대로 일했고 양동 판자촌에 살 때는 방 한칸에 살며 ‘색시 장사’도 했다. 남매가 장성한 뒤에도 판자촌 삶은 그대로였다. 중학을 중퇴한 아들은 일용직 건설 노동자고 며느리는 가난이 싫어 아이 셋을 두고 가출하는 바람에 정 할머니는 손주 셋까지 떠안았다. 사당동이 철거될 때 중계동의 영구임대 아파트를 겨우 얻었다. 방 한칸에 거실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자 바로 정 할머니 아들은 연변에서 아내를 새로 맞아들였다. 일년도 되기 전에 연변 며느리도 가난이 싫었는지 떠났다. 정 할머니가 세상을 뜬 뒤 아파트를 승계한 아버지를 모시게 된 큰손자도 일용직 노동자다. 필리핀에서 아내를 맞았다. 정 할머니 손녀의 큰딸, 즉 증손녀는 중학교 때 북한 이주민의 아들과 만났다. 북한 이주민에게 주거를 지원한 임대 아파트는 정 할머니 손녀가 사는 임대 아파트와 한동네였다. 북쪽 소년과 남쪽 소녀의 만남은 로맨스 소설이 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가족이 사회이동의 사다리를 조금이라도 오를 것인가에 관심을 쏟으며 지켜보던 나는 어느 순간 그런 질문을 내려놓았다.

인순 아주머니가 전쟁 때 손을 놓친 그의 어머니는 아마 20대였을 것이고 정 할머니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생존했다면 90대다. 정 할머니 아들과 인순 아주머니는 70대로 같은 연배이고 자녀들은 같은 40대이며 손자녀도 같은 10대 후반이다. 정 할머니 손녀는 이혼하고 밤에는 노래방 도우미, 낮에는 가내 부업을 하며 서울시 공공 임대 빌라에 산다. 시카고의 인순 아주머니의 딸과 비슷하다. 이 두 가족의 70년에 걸친 잔혹 동화 같은 잔혹 실화는 지극히 운이 나쁜 개인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성과 사랑과 가족이 사적 영역으로만 치부될 수도 없다. 성탄절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어떤 선물 꾸러미 중 무엇을 풀 것인가 고심하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캐리커처를 보면서 마치 우리는 거대한 전쟁놀이의 구경꾼이 된 듯 불편하다. 한반도가 초강대국 리더십의 시험대로 불릴 때 그 땅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모깃소리처럼 말해야 하는 것도 불편하다. 새로운 안보와 평화체제 운운하며 강대국 지도자들이 맞잡은 손을 보는 일도 편치 않다. 어떤 가혹한 70년이 우리 중 누구에게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과 불안이 유령처럼 떠돌며 우리의 사유와 감각을 마비시키는 일이 언제 마감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조은 ㅣ 사회학자,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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