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9 18:24
수정 : 2019.12.30 02:05
김곡 ㅣ 영화감독
오케이(OK)입니까, 엔지(NG)입니까. 한 테이크 끝나자마자 스크립터가 또 물어본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얄미운 사람. 그만 좀 물어보세요, 좀.
솔직히 감독 머릿속에 오케이 컷이 이데아처럼 미리 아로새겨져 있어 어떤 테이크만 봐도 한눈에 탁 알아볼 수 있다는 건 뻥이다. 그 감독이 못나서가 아니라 영화의 본성이 그렇지 않다. 영화는 여러 스태프를 만나면서 비로소 자라난다. 아무리 단단하게 엮인 시나리오라도 촬영·미술·의상 스태프를 만나면서 채색되고 가공되며, 배우를 만나면 더 그러하다. 더구나 하나의 컷은 언제나 다른 컷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편집을 하다 보면 오케이 컷이 엔지 컷이 되고, 반대로 엔지 컷이 오케이 컷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영화는 엔지도 오케이가 되는 관계의 미학이다. 산타 할아버지는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 알고 계신다지만, 영화감독은 뭐가 착한 컷인지 나쁜 컷인지 몰라야 정상이다. 심지어 산타 할아버지도 가끔 나쁜 애한테도 선물을 주신다. 내가 받아봤다.
실상 인생의 오케이 컷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많은 불행을 주는가. 오케이가 엔지로, 엔지가 오케이가 되기도 하는 관계성과 가변성은 깡그리 묵살한 채, 습관이 7가지나 되는 성공한 사람들이 강요하고 자기계발서가 홍보하는 ‘최선의 삶’에 모든 다양성을 끼워 맞추며, 우리는 오케이 인생과 엔지 인생을 스스로 재단하고 심판하며 오케이 인생의 노예가 되어간다. 산타 할아버지가 환영이었음을 깨닫는 평균연령이 7살이라지만, 그렇게 우리는 70살까지도 오케이 인생의 환영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누가 착한 애인지 나쁜 애인지는 더는 가리지 않아도, 누구 인생이 오케이 인생이고 엔지 인생인지 기어코 가려내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며 설레던 그때나 설렘은 시간 낭비라고 자조하는 지금이나, 아무리 엔지 같아 보이는 어떤 인생도 사실은 오케이여서 하등 꿀릴 것 없는 근사한 영화 한 편이 되고 있음을 애써 부정하며.
인생도 영화다. 매 순간이 하나의 컷이며, 우린 그를 연출하는 감독으로 생을 살아간다. 돌아보면, 버릴 컷 하나 없이 얼마나 찬란한 장면들이었나. 오케이와 엔지를 작위적으로 나누지 않고도 기꺼이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렸고 선물 받을 희망을 품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의미를 감각해내던 언젠가의 우리는, 고작 몇년을 더 살았다고 이젠 어른 행세를 하면서 오케이 인생과 엔지 인생을 나누려 드는가. 하루하루가 근사한 영화였고, 아무리 시시콜콜한 사건에도 설렐 줄 아는 탁월한 배우였던 언젠가의 우리는, 고작 하루를 몇 편 더 찍어봤다고 이젠 대감독 행세를 하면서 인생을 오케이 컷과 엔지 컷으로 재단하려 드는가.
영화가 관계와 관점의 예술로서 웅변하는 바는 완벽한 오케이 컷 따위란 없다는 사실이다. 또 그 이유는 완벽한 엔지 컷도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관계적 본성상 오케이 컷이란 천상의 이데아처럼 미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컷이 다른 컷들과 만나 오케이가 될 뿐이다. 일반적으로 영화 한 편은 오케이 컷의 연쇄가 아닌, 서로를 오케이 컷으로 만들어주는 엔지 컷들의 연쇄가 된다. 삶도 그러하리라.
그래서 오케이입니까, 스크립터의 집요한 질문에 이제 세상 당당 대답하련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내가 못난 감독이어서가 아니라, 오케이 컷이란 게 원래 없기 때문입니다. 삶도 그러할 겁니다. 제발, 지난해가 엔지 컷이었어도 내년은 오케이 컷일 거라고 서로 혹은 자신에게 위로하지 않기를. 반대로 지난해를 오케이 컷으로 만들기 위해 내년이 오는 것임에. 삶이라는 컷들의 연쇄는 원래 그러한 관계의 예술임에. 2020년도 그러할 것임에.
*그동안 ‘김곡의 똑똑똑’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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