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9 18:26
수정 : 2019.12.30 02:05
박진영 ㅣ 경제 미디어 <어피티> 대표
2019년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대표적인 사건을 꼽자면, 단연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상품(DLF·DLS) 사태다. 은행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원금 손실 위험이 높은 상품을 마구잡이로 판매해, 고령층을 위주로 대규모의 원금 손실이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이다.
이전에도 은행의 불완전판매 사례는 적지 않았지만, 이번엔 그 피해 규모가 상당했다. 금융권에서도 재발방지 대책을 준비하는 등 전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결국 지난 11월 정부는 은행에서 디엘에프, 디엘에스와 같은 고위험 투자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은행 입장에서는 꽤 큰 타격이 예상됐다. 높은 판매수수료 수익을 내던 상품을 앞으로 팔지 못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태가 마무리되나 싶던 그때, 금융위원회는 은행장과의 간담회 이후 고위험 상품 판매를 일부 허용하겠다는 소식을 내놨다. 주가연계신탁(ELT)이라는 상품을 제한적 범위 안에서 여전히 은행에서 판매할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다. 한 은행장이 이 소식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는 기사가 포털 뉴스 금융 페이지 상단을 장식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릴까?
이엘티. 난생처음 보는 단어의 조합인 이 상품은 ‘지수의 움직임’만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을 신탁의 방식으로 운용하는 파생상품이다. 설명도 어려운데, 핵심적인 내용만 얘기하면 이렇다.
이엘티에 투자한다는 것은 ‘코스피와 같은 지수의 움직임을 기초로 한 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지수가 오르면 수익을 내는 게 아니라, 내가 예측한 대로 지수가 움직이면 수익을 내는 구조다. 코스피가 떨어지더라도, 내가 떨어지는 쪽으로 베팅했다면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지수에 투자하는 건 주식 투자보다 안전하다. 한 기업의 주가는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데, 코스피나 코스닥과 같은 지수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급등하거나 급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안전한 대신 기대수익률은 낮다. 그래서 이엘티는 다른 파생상품에 비해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이번에 금융위원회에서 ‘이엘티는 계속 팔아도 된다’고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이엘티라는 상품이 원금 손실의 위험이 있는 투자상품’이라는 사실 하나다. 내 돈을 맡기는 고객에게 ‘비교적 안전하다’는 설명은 무의미하다.
최근에는 영업 대상의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보통 고위험 투자상품은 여유자산이 있는 고령자 고객에게 권유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에는 2030 사회초년생 고객에게 새로운 영업 루트가 생겼다.
퇴직연금(IRP)이 그 연결고리다. 퇴직연금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은행에 방문해 아이아르피 계좌를 개설해야 하는데, 이때 상담 과정에서 슬쩍 위험성 있는 투자상품을 끼워넣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나도 모르게 이엘에스와 같은 위험성 높은 파생상품에 가입한 2030 고객이 지금도 적지 않다.
이렇게 2019년 최악의 금융사건 이후에도, 결국 은행에서의 고위험 상품 판매는 전면 금지되지 않았다. 초저금리 시대. 은행 입장에서는 고객이 예·적금으로 돈을 맡겨놓는 것보다는 이엘티를 하나라도 더 파는 게 남는 장사이기에, 고객에게 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금융회사의 책임 강화라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이상, 금융권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밖에 없다. 여러 규제를 만들어 왔지만, 늘 금융상품 영업은 규제를 뚫고 진화해 왔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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