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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6 19:00 수정 : 2020.01.07 09:41

김원영 ㅣ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20년 전, 처음으로 여당이 된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한 국회의원이 나를 초대했다. 국회는커녕 여의도에 가본 일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운전한 차를 국회의사당 앞 넓은 주차장에 세우고, 어머니와 둘이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건물로 들어갔다. 재활학교(특수학교)에 재학 중이던 나는 그 무렵 월 10만원가량의 후원금을 받고 있었고, 모임의 회장은 그 국회의원이었다.(그는 당시 장애인을 위해 여러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약사협회장을 비롯하여 한국 사회에서 이런저런 권력과 자원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코디네이터 구실을 맡았던 담당자가 재활학교를 방문했을 때 “아이들의 눈빛이 맑아서” 자기가 힘을 얻고 간다는 등의 말을 했고, 나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들었다. 식사를 기다리며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되자 참여자들은 각자 직업과 역할을 소개하며 국회의원에게 기대하는 바를 말했다. 어머니는 참석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고, 내 차례는 건너뛰었다.

정치와 정책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어머니와 나는 아무런 이야기 없이 생선구이를 먹었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위기의 폭풍 속에서 힘든 시기를 넘기던 우리 가족은 당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당연히 감사한 마음이었다.(몇 달 뒤부터 후원금이 잘 나오지 않았다. 실무자는 뭔가 오류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나 국회에서의 그 식사 자리가 17살의 내게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맑은 눈빛으로’ 그 자리에 앉아 후원자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모임에 아름다운 정당성을 부여하기에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역할이 내 욕망과 성향에 부합하지 않았다.

20년이 지나 더불어민주당은 척수장애인 최혜영 강동대 교수를 인재영입 1호로 발표했다. 장애 여성으로서의 경험은 우리 정치권에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다만 최혜영 교수를 소개하는 더불어민주당의 퍼포먼스와 언론 보도는 20년 전 국회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이해찬 대표 등이 최혜영 교수의 휠체어를 따듯한 표정으로 밀어주었고, 언론은 그 이미지와 함께 최혜영 교수가 ‘장애를 극복’한 미담을 전하면서, (그 자신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치는 잘 모르지만’ 장애는 극복한 인물이 ‘정치 인재’가 되는 신기한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보도했다.

1인 미디어를 포함해 여러 매체에서 장애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대지만 지난 2년이 넘게 무려 <한겨레>에 직접 칼럼을 쓴 일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였다. 국회의사당을 처음 가 보릿자루의 모습으로 생선구이를 먹던 때를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칼럼을 쓰는 내내 이 지면의 글들이 우리 사회의 주된 정치행위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가닿는지 궁금했다. 진중권씨의 페이스북 글에도 즉각 반응하는 주류 정치인들은 이른바 ‘소수자’로 불리는 사람들의 발언을 얼마나 듣는가? ‘여성을 극복’했다거나, ‘강원도민임을 극복’했다는 말이 터무니없듯이, 장애를 극복했다는 말은 진부할 뿐 아니라 장애를 그저 개인의 불운으로 환원하는 문제가 있음을 지난 십수년간 주장해왔음에도, 왜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언어와 상징 속에서 장애인 정치인의 탄생을 지켜봐야 하는가?

소수자의 법적 권리 주장(차별금지법), 언어를 둘러싼 논쟁(‘장애극복’) 등은, 한국 정치인들에게 그저 ‘거대한 해일’에 맞서는 데 필요한 ‘맑은 눈을 가진’ 아이의 불가피한 징징거림으로 보이지는 않는가? 지난 세월 한국 정치의 제도와 담론을 주도한 사람들에게 청년 정치인이나 장애인 정치인들은, 안보·경제·국가폭력과 분단을 해결하려 애쓰는 자신들이 안락하게 펼쳐놓은 민주화라는 무대 위를 그저 순진하게 뛰놀며 악이나 쓰는 아이들로 취급되지는 않는가? 2020년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등장을 바란다. 국회에 들어가 억대 연봉을 받고 권력을 누리려면 여의도를 따듯하게 만드는 역할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마땅한 정치적 주체가 되기 위해 싸우고 협상해야 한다.

*그동안 ‘김원영의 공감세상’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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