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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8 18:34 수정 : 2020.01.09 09:37

석진환 ㅣ  정치팀장

더불어민주당이 모병제와 청년신도시 정책을 접었다고 한다. 청년층을 겨냥해 애드벌룬처럼 띄운 두 정책 이슈를 <한겨레>는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래도 아쉽거나 섭섭하지 않다. 민주당이 실현 가능하지도 않은 공수표를 날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헛된 기대를 품게 하는 무책임한 정치를 했다고 보지도 않는다. 공론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안정적 직업을 갖게 된 걸 축하받으며 군인이 되는 사회. 앞날을 준비하는 청년·신혼부부가 주거·출산·육아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지원하는 도시공동체. 상상만 해도 기분 좋은 이런 청사진은 이번 총선이 아니더라도 다음 대선에서 또 누군가 제안할 것이고 토론이 이뤄지기 마련이다. 당장은 현실성이 좀 떨어져 보여도 괜찮은 구상을 국민에게 내놓는 일, 밥상머리에서든 술자리에서든 이야기 나눌 소재를 제공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정치의 의무다.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 상상하기 어려운 공동체의 꿈을 말하는 것 또한 마땅히 정치의 영역이다.

‘정치 혐오’의 시대, 정치가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정치권 현장 취재 때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2012년 민주당 대선 경선 때 손학규 후보가 내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이 그랬다. 가슴 뛰는 문구였다. 날마다 도끼눈을 뜨고 정치면 기삿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를 멈춰 세우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당시 손 후보는 경선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문재인 후보가 이 슬로건을 승계했고, ‘저녁이 있는 삶’은 이후로도 공동체가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으로 남았다. 7년여가 지난 지금, 갈 길은 멀어도 노동시간 단축은 조금씩 현실이 되고 있다. 아직 온전한 저녁을 선물받지 못했지만 내 삶도 크게 나아졌다. 주 6일 근무가 당연했던 나는 지금 주 5일 근무를 한다. 정치가 한 일이다.

보수정당에서도 나를 설레게 하는 이가 있었다. 2015년 4월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은 대한민국 보수 정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제시한 ‘바이블’ 같았다. 집권 여당 원내대표가 “증세 없는 복지가 허구”라고 고백하며 임기 반환점도 돌지 않은 서슬 퍼런 박근혜 대통령에 맞섰다. 진영 대결을 넘어 양극화 해소를 호소했던 장면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재벌을 향해 “동네 자영업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끄러운 행태를 거둬들이라”고 일갈하고, 정부를 향해서는 “재벌 대기업에 임금 인상을 호소할 게 아니라, 하청 단가를 올려 중소기업의 임금 인상과 고용 유지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할 때는 짜릿했다.

물론 그다음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 연설에 발끈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청와대의 명을 받은 친박계 의원들이 집요한 ‘토끼몰이’로 유 의원을 찍어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참패하지 않았을 수 있고, 탄핵도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고, 새누리당도 쪼개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보수 정치가 지금 이렇게까지 ‘폭망’하진 않았을 듯싶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다시 보수 정치권이 분주해지고 있다. 다시 통합하자는 게 화두인데, 어쩐지 ‘묻지 마 통합’ 같아서 미덥지 않다. 통합을 주도하고 싶은 자유한국당은 탄핵 당시와 달라진 게 없다. 국민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현 정부를 향한 독설뿐이다. 정책 대안은 적고, 국민 다수가 지지하는 ‘유치원 3법’마저 막아서고 있다. 대안 없이 말만 거칠어지다 보니 날이 무뎌졌다. 이젠 어떤 말도 가슴에 꽂히지 않는다. 그나마 기득권을 내려놓고 성찰의 언어를 꺼낸 이들은 대부분 ‘보수 폭망’의 책임이 덜한 비주류다. 사정이 이런데 보수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화가 풀리고 마음이 움직일까.

보수 정치권은 통합 논의에 앞서 자기 점검을 먼저 해야 한다. 새로운보수당 유승민 의원이 보수재건위원장이라는 낯선 직책을 맡은 것도 그런 의미일 것으로 기대한다. 재건부터 해야 통합도 가능하다. 서두르지 말고 각자 아프고 고장 난 데는 없는지 검진부터 하고 합쳐야 오래간다. 스스로 혁신하고 ‘저녁이 있는 삶’처럼 국민이 기대를 가질 만한 메시지도 던졌으면 한다. 한쪽 날개가 곪으면 반대편 날개도 힘겨울 수밖에 없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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