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9 20:34
수정 : 2020.01.10 13:08
박권일 l 사회비평가
‘탈-진실’(post-truth).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2016년의 단어’다. “객관적 사실이 공중의 의견을 형성하는 데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영향력을 덜 끼치는” 시대 상황을 가리킨다. 즉, 사실을 날조·왜곡해 선동하는 행위가 ‘대세’라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세계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인물이 있으니 바로 유시민씨다.
‘유시민의 탈진실’ 시리즈 최신작은 연초 티브이 토론회에서 방영됐다. 그는 참여정부 시기 한나라당이 국회를 완전히 점거해 국가보안법 폐지, 신문법, 사학법 등 개혁입법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몇시간도 되지 않아 반박이 나왔다.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던 이부영 전 의원은 “유시민의 거짓 주장은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한나라당의 점거 때문이 아니라 유시민 의원 때문에 개혁입법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실제 모든 기록 및 보도가 이부영 전 의원의 반박이 ‘팩트’임을 증명한다. 당시 유시민 의원 등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고집하며 부분 개정을 반대했고, 결국 한나라당과의 협상이 엎어지면서 국가보안법은 일점일획도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게 됐다.
유시민씨는 ‘탈진실’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부터 ‘탈진실’의 선구자였다. 황우석 사태가 한창이던 2005년 12월, 그는 한 강연에서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피디수첩> 프로듀서가 황우석 교수를 검증하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내가 검증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기자나 나나 생명공학에 대해서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나는 보건복지위원을 2년이나 했기 때문에 좀 안다. 그 분야를 (피디수첩이) 무모하게 덤볐다. 부당한 방법으로 과학자를 못살게 구니까 방송국이 흔들흔들하고 광고 끊어지고 난리 아니냐.” 역시 황우석 사태는 지식인을 검증하는 최고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이렇게 말하면 전통의 ‘탈진실’ 매체 <조선일보>, 황당무계한 거짓말이 판치는 극우 유튜브 방송부터 비판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꼭 나온다. 물론 조선일보는 ‘나쁜 언론’이다. 지적하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다. 오죽하면 시민들이 특정 언론사를 반대하는 운동(‘안티조선’ 운동)을 벌였을까. 그게 벌써 20년 전이다. 필자 역시 공적 글쓰기를 ‘안티조선’ 운동으로 시작했고 지금도 조선일보 기사는 링크조차 걸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1등’이지만 시민들 시선은 20년 전과 다르다. <시사인>의 ‘2019 대한민국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가장 불신하는 매체’ 1위가 조선일보였다. 반면 지금까지 ‘언론인 유시민’의 문제는 거의 지적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비판과 유시민 비판은 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며 얼마든지 병행 가능하다.
극우 성향 유튜브 방송은 어떨까. 앞서 언급한 조사에 따르면, ‘가장 신뢰하는 언론인’ 부문에서 유시민씨는 손석희씨에 이어 2위였다. 김어준씨가 3위, 극우 유튜버로 분류할 수 있는 김동길·정규재씨가 4·5위다. 유시민씨의 신뢰도(5.2%)는 김동길(1.0%)씨, 정규재(0.9%)씨를 각각 5배 넘어선다.
거짓말의 절대량을 따지면 유시민씨보다 극우 유튜버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총량이 아니라 효과다. ‘양치기 소년’은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다들 ‘양치기 소년’임을 알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9의 사실에 1의 치명적 거짓말을 섞는 사람이 거대한 공신력을 얻은 경우다. 이 상황이 가장 위험하다. 본질은 ‘양치기 소년’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거나 심지어 ‘네덜란드 소년’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급기야 사람들은 거짓말이 밝혀져도 신뢰를 거두기는커녕 두둔하기까지 한다. “사람이 틀릴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우린 유시민을 믿고 지지한다. 왜냐면 유시민은 틀릴 수는 있지만 절대 속이지는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아니까.” 최근 유시민씨의 거짓말을 지적한 어느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이다. ‘탈진실’의 시대정신이 이 댓글 하나에 모두 담겨 있다.
‘언론인 유시민’을 둘러싼 이 모든 풍경은 공론장의 신뢰, 나아가 민주주의 자체가 근간부터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시민씨는 새해 벽두부터 이틀 연속으로 티브이에 나와 세상 모든 문제 전문가 행세를 하며 사실 왜곡을 일삼았다. 그에게 과한 발언권을 주는 언론 역시 깊이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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