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16 16:10
수정 : 2020.01.17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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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준법감시위원장으로 내정된 김지형 전 대법관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기 앞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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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삼성 회장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 특검 문제로 국민에게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2008년 4월22일 이건희 회장은 삼성 특검의 기소를 앞두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국민 사과문을 읽었다. 자신의 경영 퇴진과 정도·투명경영 강화를 포함한 10개 항의 쇄신안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어진 특검 재판에서 그의 태도는 돌변했다.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타이밍과 운이 좋았을 뿐 … 경영권 승계를 지시한 적이 없다.” 이재용 부회장은 부친인 이 회장으로부터 61억원을 증여받은 뒤 에버랜드 주식 등을 헐값에 인수해 1조원이 넘는 삼성 주식을 확보했다. 그런데도 이를 모두 ‘운’이라고 우겼으니, 국민을 바보로 여긴 것 같다. 이 회장은 1년 반 뒤인 2009년 말 엠비(MB) 정부에 의해 사면복권됐고, 석달 뒤에는 경영에 복귀했다. 삼성 쇄신안은 그렇게 ‘깜짝쇼’로 끝났다.
삼성이 준법경영을 위해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이유는 이런 흑역사 때문이다. 삼성은 대형 불법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쇄신안을 내놓았지만, 모두 ‘위기 모면용’ 이벤트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엑스파일 사건 직후인 2006년에 그랬고, 2017년 이재용 부회장 뇌물공여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잊혔지만, 2005년 3월 윤리·투명경영을 담은 ‘삼성 경영원칙’ 발표는 한편의 ‘코미디’였다. 삼성은 노무현 정부와 체결한 ‘투명사회 협약’을 실천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건희 회장이 1987년 취임 때부터 역설한 윤리경영 철학을 구체화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불과 넉달 뒤 엑스파일 사건이 터지면서, 정치권·검찰과의 오랜 검은 유착관계가 드러났다. 삼성이 국민을 바보 취급한 건 한번이 아니다.
준법감시위원장을 맡은 김지형 전 대법관도 부담이 컸던 것 같다. 처음에는 삼성의 진정성을 믿기 어려워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준법감시위의 완전한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 마음을 바꿨다고 밝혔다.
정말 이번에는 삼성을 믿어도 될까? 객관적으로 보면 비관적이다. 무엇보다 준법감시위는 삼성의 자발성에 기초한 게 아니다. 뇌물사건 파기 환송심 재판부가 “실효적 준법감시제도를 만들라”고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발표도 1월17일 파기 환송심 재판을 1주일 앞두고 이뤄졌다. 벌써부터 ‘이재용 집행유예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재벌 총수에게는 죄가 무거워도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의 이른바 ‘3·5법칙’이 적용되는 ‘재벌 봐주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유령처럼 어른거린다.
더 큰 문제는 이 부회장의 태도다. 지난 3년간 삼성에 ‘범죄기업’이라는 오명을 씌운 사건들은 모두 경영권 승계에서 비롯됐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의혹은 그가 주식을 보유한 제일모직에 유리한 합병 비율이 쟁점이다. 이후 무리한 합병에 대한 국민연금의 찬성을 얻으려고 국정농단 세력에 87억원의 뇌물을 줬다. 또 합병을 합리화하기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다. 이어 공장 바닥을 뜯고 분식회계의 증거를 숨겼다. 이 부회장의 욕심만 아니라면 모두 없었을 일들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책임감이 있었다면, 진작에 국민에게 직접 사과하고 경영 퇴진 등을 포함한 쇄신안을 내놨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 잘못은 내가 다 지고 갈 테니 삼성의 변화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2017년 2월 기소 이후 3년 동안 침묵만 지키더니 결국 김 전 대법관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숨어버렸다. 김 전 대법관이 삼성전자 백혈병 조정위원장 등을 맡은 전력으로 사회적 신망이 높지만, 이 부회장의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의 태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총수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재벌의 ‘황제경영’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에 치명적 타격을 줄 위험을 감수하고 뇌물을 제공했다. 경영권 승계만 성공하면 수조원의 막대한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총수부터 이런 검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준법경영은 ‘공염불’이다.
삼성은 준법감시위 출범 직전 정부에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해법을 물었다고 한다. 경영학의 구루인 피터 드러커는 최고경영자의 핵심 덕목으로 “기꺼이 책임을 떠맡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꼽았다. 이 부회장은 더 이상 뒤로 숨지 말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곽정수 논설위원
jskwak@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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