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전 사퇴의사를 밝힌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서울 영등포 당사에서 이미 사퇴한 천정배 전 원내대표와 당 시무식에 참석해 당원들과 국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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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그들은 진정 ‘강경파’인가? ‘항로표지관리소 직원’. 바닷가 등대를 지키는 이들은 ‘등대지기’ 대신 이렇게 불리기를 바란다.‘환경미화원-청소부’ ‘비전향장기수-미전향장기수’ ‘미화원-구두닦이’ 등등. 모두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과 한쪽 고리를 걸고 있다. ‘강경파’.지난 며칠간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에게 찍힌 ‘낙인’이다. 지난해 말 국가보안법의 연내 폐지를 주장했던 의원들을 언론과 정치권은 이렇게 규정하고, 이들을 ‘강경파’라고 불렀다. 토론과 타협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정치에서 ‘강경파’는 좋게 말해 ‘근본주의자’, 솔직하게 표현해 ‘말이 통하지 않는 꼴통들’이다. 열린우리당의 당의장과 원내대표 사퇴로 이어진 ‘4대 개혁입법’의 처리무산과 그 내홍의 책임은 ‘강경파’ 탓으로 돌려졌다. 이부영 의장 “당 과격노선 맞서 과감한 투쟁 해야”
이부영 의장은 지난 3일 사퇴의사를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강경투쟁은 오히려 불안감을 조성하고 대통령의 국정운영에도 차질을 부른다. …전략, 전술적 관점보다는 그때그때 자기 자신을 드러나고자 하는 과격 커머셜리즘 같은 타성에 젖어 있다. …당의 과격노선에 맞서 과감한 투쟁을 해야 한다. …집권여당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해내기 위해서는 대야타협이 필요한 시점인데 강경투쟁은 오히려 불안감을 조성하고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도 차질을 부른다.” 이부영 의장의 발언을 두고, 언론은 “이 의장이 ‘강경파’를 비판했다”고 해석·보도했다. 이만섭 “어느 정당이든 강경파가 주도하는 정당은 망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도 지난 3일 <평화방송> 인터뷰에서 “어느 정당이든 강경파가 주도하는 정당은 망했다. …강경파가 득세하면 반드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만섭씨는 이날 “(나의) 41년간의 정치와 8년간의 언론계 경험으로 볼 때 어느 정당이든 강경파가 주도하는 정당은 망했다. 3공화국 때 차지철이라는 강경파가 득세해서 (국회를) 좌지우지했는데 결국 망했다“며 ” (강경파는) 꼭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만섭씨의 ‘강경파 주도정당은 망한다’는 발언은 이튿날 보수언론에서 대서특필되고 사진과 함께 상자기사로 처리되었다. 중앙일보 사설 “강경노선에 휘둘리면 정치 희망은 없다” 보수언론도 호재를 만났다. <중앙일보>의 지난 4일자 사설 제목은 “강경노선에 휘둘리면 정치 희망은 없다”였다. 하지만, 정작 ‘강경파’라 불리는 당사자들은 ‘강경파’라 불리기를 거부한다. 마치 ‘등대지기’가 ‘등대지기’로 불리기를 거부하듯이. ‘4대 개혁입법’의 연내관철 주장을 이끌었던 장영달 열린우리당 의원은 4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터뷰에서 “나는 강경파가 아니다. …(여야 협상실패의 책임을) 원칙을 주장했던 사람에게 돌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태홍 의원도 “우리는 국보법 연내폐지라는 당론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이다. 올바른 의도를 갖지 않은 언론에서 당내를 이간질하기 위해 강경파라는 말을 사용했다. 우리가 강경파라면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단식을 했던 1000여명의 시민들과 국보법 폐지 성명 등을 냈던 민변, 참여연대, 민교협 등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 그들도 강경파인가?”라고 반박했다. 열린우리당 홈페이지에도 “원칙을 갖고 올바르게 개혁하자는 게 강경파라면 기꺼이 강경파가 되겠다”는 글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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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달·김태홍 “여야협상 실패 책임을 보안법 연내폐지 당론에 충실한 우리가 져야 한나?” 이에 앞서 천정배 원내대표도 3일 기자간담회에서 “‘강경파’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고, “난 강경파가 아니다. 합리적 대화론자다”라고 ‘강경파’이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강경파들한테는 타협한다고 욕먹고, 중진들한테는 타협 안한다고 욕먹었다. 내가 합리적 대화론자라는 근거 아니냐?”며 ‘강경파’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을 가리켰다. 유시민 의원을 중심으로 김원웅, 정청래, 유기홍 의원 등 개혁성향의 의원 2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 ‘참여정치연구회’의 반박성명은 ‘강경파’라는 용어선택의 문제점을 통박한다. 이들이 지난 3일 낸 성명의 제목은 “야합반대를 ‘강경파’로 매도 말라”였다. “일부 정치인과 언론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개혁입법 연내 처리를 주장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강경파’라고 매도하고 있다. “과격노선과 투쟁도 불사” 하겠단다. …정치개혁을 바라는 우리당 당원과 의원들이 국가보안법을 연내에 폐지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은 국민과 시대의 요구에 화답하기 위해서다. 우리당은 중앙위원회와 의원총회에서 국가보안법 연내폐지를 당론으로 정하고 이를 국민에게 약속했다. …죽음(단식)으로 호소하는 이들에게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료 의원과 지도부를 설득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강경파로 매도해서는 안된다. …반의회주의 야합세력에 맞서 의회민주주의의 참뜻을 살리자는 주장이 어떻게 과격노선인가. 야합을 반대하는 민주세력이 왜 일부 강경파인가. …국민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야합을 반대하고 의회민주주의를 되살리려 노력한 당원과 의원들을 밥 먹듯 국민을 배신해온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강경파로 매도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참정연 성명 “ 야합을 반대하는 민주세력이 왜 일부 강경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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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이기를 통한 ‘덮어씌우기’는 정치인들의 일상” 전영철 한국외대 언어학과 교수도 “이름을 붙임으로써 생기는 ‘마력’이 있고, ‘강경파’라는 말은 외골수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킨다”며 “이름 붙이기를 통한 ‘덮어씌우기’는 정치인들의 일상이다”고 지적했다. 하이데거가 “사물을 명명하는 것은 사물을 죽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듯, ‘강경파’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들의 본질은 한참이나 왜곡된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모든 취재원들이 비슷한 해석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일한 현상을 두고 벌이는 정치적 해석의 차이가 불러온 것이었다. 서울대 양승목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말이다. “(그들을 두고) ‘원칙주의자’라고 해도 되겠지만, ‘강경파’를 두고 ‘강경파’라고 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나? 정치적 사실관계를 왜곡한 게 아니다. ” 비전향장기수와 미전향장기수의 도저한 차이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선고된 형량에 덧붙여 십수년을 ‘보너스’로 징역살이한 ‘장기수’들이 있다. 이들을 일부 언론은 ‘비전향장기수’라고 불렀고, 다수의 보수언론들은 ‘미전향장기수’라고 불렀다. 비전향과 미전향은 ㅂ과 ㅁ의 미세한 차이이지만, 그 단어 하나에 담긴 사상의 차이는 동쪽끝과 서쪽끝의 차이에 견줄 만하다. ‘비전향’이 주체적으로 전향을 거부한 채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인정’라면, ‘미전향’은 아직 전향을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전향을 시키고야 말 공작대상이다. 달리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경구가 회자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밀알에 온 우주의 섭리가 들어 있듯, 한 단어에 담긴 정치적·사회적 함의는 언어학적 의미론을 넘어선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의 국면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향해 ‘ 당 자체를 말아먹고야 말 강경파’라고 지칭하는 것이 바로 그러하다. ***국가보안법 논쟁 과정에서 <한겨레>도 ‘240시간 연속의총’ 등을 하며 농성을 벌인 열린우리당 의원 등을 가리켜 ‘강경파’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한겨레> 정치부 황준범 기자는 “이른바 ‘강경파’가 주장하는 내용이 전혀 강경하다고 볼 수 없었지만, 당내 의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마땅한 말이 없어 깊은 생각없이 쓰게 됐다”고 말했다. 황 기자는 “‘참여정치연구회’ 등의 의견을 존중해 앞으로 ‘강경파’라는 표현을 더이상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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