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단 거의 몰라
아침 숙소 검색대 설치
수뇌부 방문 감지
시간·장소 귀엣말로 통보
5시간여 만나 17일 오전8시:하지만 17일 오전 8시께 당국 대표단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 정문에 검색대가 설치되는 것이 목격되면서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검색대 주변을 북쪽 관계자 서너명이 지켜서자, 대표단 사이에서는 북쪽 ‘수뇌부’의 방문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전날 송별 만찬을 베풀었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예방 가능성이 나오는 정도였다. 오전 8시25분:초대소 안에 있는 인공호수 주변에서 자문단으로 함께 방북한 최상룡 고려대 교수와 조깅을 하고 있던 정 장관에게 김상일 수행비서가 달려가 ‘긴급 보고’를 한 시각은 오전 8시25분께였다. 정 장관은 곧바로 숙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현관에서 이번 행사 북쪽 단장인 김기남 당 비서겸 조평통 부위원장과 마주쳤다. 선 채로 약 30초 가량 귀엣말을 나눈 김 비서는 곧바로 검은색 벤츠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김 국방위원장의 전격 면담을 통보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백화원 초대소 영빈각 정문 앞에는 북쪽이 정 장관에게 내준 벤츠 리무진이 시동을 켠 채 대기에 들어갔다. 또 미리 설치된 검색대 주변엔 권총을 휴대한 북쪽 요원 10명이 늘어섰고, 리무진 주변 경계도 삼엄해졌다. 오전 9시15분:잠시 뒤인 오전 9시15분께 당국 대표단 대변인을 맡은 김홍재 통일부 홍보관리관이 백화원 초대소 3층 프레스센터로 찾아왔다. 그는 “정 장관과 김 위원장의 면담이 오늘 중 이뤄질 예정”이라고 짧게 밝혔다. 이로써 정 장관은 지난 2002년 5월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방북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이후 김 위원장을 만난 첫번째 남쪽 인물이 됐다. 오전 10시38분:이어 이날 오전 10시38분. 상기된 표정의 정 장관은 수행원 1명과 함께 대기 중이던 승용차에 올라 어딘가로 향했다. 정 장관이 출발한 뒤 채 1시간도 안돼 임동원·박재규 전 통일부장관과 최학래 한겨레신문사 고문, 김보현 전 국가정보원 3차장 등이 별도의 승용차를 이용해 백화원을 떠났다. 이들은 “과거에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고 싶다”는 김 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이날 김 위원장과 오찬을 함께 했다. 민간대표단으로 방북한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와 강만길 상지대 총장 등도 오찬 초대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4시8분:이날 면담을 겸한 오찬은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다. 정 장관 일행이 백화원초대소로 돌아온 시간은 4시8분께. 정 장관은 “좋은 대화 많이 나누었느냐”는 질문에 밝은 표정으로 “네”라고 짧게 대답했다. 평양/공동취재단,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2002년 시나리오 2005년 재연 북-미관계 악화→남 특사 파견→북 전격 면담 17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은 3년 전인 2002년 4월4일 임동원 당시 외교안보통일 특보와 김 위원장의 면담을 떠올리게 한다. 우선 면담을 앞둔 상황부터 비슷하다. 2001년 조지 부시 행정부의 출범 이후 냉각되던 북-미관계는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사찰 등이 이어지면서 대화 단절로 이어졌다. 이번에도 북한의 6자 회담 복귀가 1년 가까이 지연되면서 핵위기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위기 돌파 방법도 비슷하다. 두 차례 모두 남쪽은 특사 또는 특사 성격을 지닌 인물을 파견했고, 북쪽은 김 위원장의 전격 면담으로 화답했다. 이는 남북 정상간의 일종의 간접대화라고 할 수 있다. 각각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메시지를 소지했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가 이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정상간 ‘간접대화’ 사전 준비 과정도 주목해 볼 만하다. 김 전 대통령은 ‘악의 축’ 발언으로 분위기가 경색된 지 한 달 뒤인 2002년 2월, 서울을 방문한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에 대한 공격의사가 없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이를 바탕으로 3월에는 북-미 뉴욕접촉이 열렸었다. 임 전 특보의 방북이 성사된 것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의 감정이 누그러뜨려진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도 북한의 2·10 핵무기 보유 선언과 3·31 핵군축회담 제의 이후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북핵문제가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나, 지난 5월13일과 6월6일 두 차례의 북-미 뉴욕 접촉과 지난 10일 한-미 정상회담으로 대화 분위기가 조성된 것으로 분석된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의 평화적·외교적 해결 원칙을 재확인하고, 궁극적으로 북-미수교를 의미하는 ‘보다 정상적인 관계’로 갈 수 있다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까지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면담 이후 순풍’ 도 재연 기대 3년전 임 전 특보와 김 위원장의 면담으로 경색된 남북관계가 해빙됐다는 점은, 이런 맥락에서 이번 ‘면담 이후’에 대한 기대를 높이게 한다. 당시 임 전 특보는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과 동해선 건설,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및 경제협력추진위 개최 등을 합의하면서 막혔던 남북관계를 뚫었다. 두달 뒤 우발적인 서해교전이라는 악재가 발생했으나 그 또한 어렵지 않게 극복했다. 이런 순풍은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방북으로 이어졌으나, 그해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프로그램 의혹 제기로 점차 역풍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 정 장관의 면담 역시 6자 회담 복귀를 촉구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메시지에 이은 것이어서, 남북관계는 물론 북핵 문제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연합, 정인환 기자
정동영 장관 열달 속앓이 한방에 싸악∼
악재 딛고 남북무대 주역으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남북대화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지난해 12월15일 주방기기업체 리빙아트의 시제품 생산을 기념하기 위해 처음으로 개성공단을 방문했을 때, 연설 도중 북한 쪽 대표가 자리를 뜨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던 그로선, 이번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이 경기 종료 직전 역전골을 떠뜨린 셈이 된다. 멀리 보이는 대통령후보 경쟁구도에서도 더할 나위없는 호재가 된다.
정 장관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7월 불거진 김일성 주석 10주기 조문 불허 파문과 탈북자 대량입국, 미국 의회의 북한인권법 제정 등 연이은 악재로 남북관계가 급랭하면서 깊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북한땅을 한번도 밟지 못한 통일부 장관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돈 것도 이 무렵이었다.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그는 더욱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북한이 지난 2월10일 핵무기 보유 및 6자 회담 불참을 선언한 이후 북핵 문제가 국제사회의 화급한 화두로 떠올랐지만, 남북대화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 장관은 절치부심했다. 지난해 말부터 림동옥 북한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앞으로 당국간 대화 재개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고, 공식·비공식 채널을 총동원해 북한을 설득했다. 북한은 비무장지대에 남쪽 소방헬기가 진입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난달 14일 당국간 회담을 열자는 요청에 호응해왔다. 10개월여에 걸친 속앓이가 확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평양 방문 마지막날인 17일 오전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이라는 ‘쾌보’를 접했다. 백화원초대소에서 조깅을 하던 중이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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