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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31 20:14 수정 : 2005.07.31 22:29

베이징 6자회담장을 휘감고 있는 ‘안개 속 외교’에도 불구하고 지난주에 북핵문제 해결의 중대한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은 건 분명하다. 미국과 북한 모두 전술과 언어의 수사를 부드럽게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핵심 쟁점에선 기존 태도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다.

만약 내가 베이징의 지난 한주를 희곡으로 쓴다면 그 제목을 ‘크리스토퍼 힐의 학습’이라 붙이겠다. 이번 회담은 조지 부시 행정부 출범 이래 미-북 양쪽이 의미있는 고위급 직접 협상을 벌인 첫 회담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 수석대표인 힐 차관보는 대미 관계정상화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북한이 나름대로 합리적 주장을 펴고 있다는 걸 배운 첫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제 힐은 워싱턴의 강경파들, 더이상 협상을 지속할 이유가 없고 대북 강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들과 맞부딪쳐야 한다. 북한과의 핵 합의를 위해선 미국이 전략과 전술을 바꿔야 한다고 힐이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자신의 경력이 훼손될 위험을 무릅쓰고 힐이 진지하게 그런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까.

한국과 중국의 압력 속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미 세가지 환영할 만한 전술의 변화를 채택했다. 이것이 강경파들의 공격을 받고 있음은 물론이다.

첫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6자회담과 완전히 구분된, 진지하고 장기적인 대북 직접대화이다. 지난주에만 다섯차례의 미-북 직접대화가 열렸다. 러시아 수석대표인 알렉산더 알렉세예프 외무차관은 “부시 행정부 들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미-북 양쪽이 깊고 실질적인 대화를 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두번째 전술 변화는 행정부 관리들이 북한체제와 지도자를 모욕하거나 자극하는 발언을 조심스럽게 피했다는 점이다. 지난 4월28일 기자회견에서 김정일을 ‘위험한 사람’이라고 불렀던 부시 대통령이 그 뒤 두차례나 ‘미스터 김정일’이란 호칭을 쓴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북한도 이번엔 핵실험을 실시하겠다거나 핵물질을 다른 나라로 이전하겠다는 식의 호전적인 성명이나 위협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세번째로는, 6자회담 전날 세시간 동안의 만찬에서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미국은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침공할 의도가 없다’는 분명한 공식 입장을 전달했다는 점이다.

양쪽의 기본 입장차이는 ‘비핵화’ 개념을 둘러싼 서로 다른 견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은 ‘비핵화’를 사찰을 통한 북핵 프로그램의 폐기 확인으로 간주했다. 북한은 지난 3월31일 발표에서 명확하게 밝혔듯이, ‘비핵화’를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사용 금지와 주한미군 기지에 저장돼 있을지 모를 핵무기의 제거로 보았다.


1993년 열린 로버트 갈루치 당시 미국쪽 핵대사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간의 뉴욕협상 때부터, 북한은 지속적으로 미국이 남한에 제공하고 있는 ‘핵우산’의 제거를 요구해왔다. 갈루치는 ‘핵무기를 포함해 북한에 대한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함으로써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유보시켰다. 평양은 1993년 약속을 제네바 핵합의의 1장 3조에 결합시킬 것을 고집했다. 1장 3조는 “미국은 핵무기 위협이나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걸 공식적으로 보장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갈루치는 훗날 나에게 “미국이 언제 3조를 준수할지 정하자는 걸 고의적으로 거부했다”고 밝혔다. 갈루치 후임인 찰스 카트먼도 “그 조항은 제네바 핵합의의 마지막 단계, 곧 북한이 핵시설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요구를 수용한 뒤에야 준수될 수 있다”고 밝혔다.

나는 이미 내 저서 <코리안 앤드게임>에서 지금의 ‘비핵화’ 의미를 둘러싼 교착상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제안을 하나 내놓은 바 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함께 한반도에서의 핵배치 또는 핵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공동으로 하고, 남북한이 현존하는 핵능력을 폐기하고 미래에도 (핵무기를) 제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이 6자회담의 어느 단계에선 이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길 기대한다.

지난 4월 평양을 방문했던 경험으로 보면, 북한은 미국이 북한 체제전환 정책을 포기하고 대북 관계정상화를 하겠다는 양보를 어느 정도 먼저 해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6자회담 공동성명 문안을 둘러싼 김계관과 힐의 논의과정에서, 김계관 부상은 회담 기조연설에서 밝힌 핵심 내용들을 다시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김 부상은 “북한과 미국이 관계정상화를 하고 신뢰를 구축하고 핵위협을 제거한다면, 북한은 핵무기를 검증가능하게 폐기하겠다”는 선언을 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이 ‘핵위협’이란 말에서 3월31일 북한 담화처럼 북한이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 핵 배치’를 직접 지칭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에겐 타협의 의미로 다가온다. 강석주 제1부상은 지난 4월 평양에서 나에게 “3월31일 발표에 언급된 ‘광범위한 군축’은 (북-미) 관계정상화 이후에나 다뤄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를 지금 당장 (협상) 테이블에 올리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번 회담과정에서 떠오른 가장 중요한 이견 중 하나는 ‘동결’의 의미를 둘러싼 분명한 시각 차이다. 김 부상은 ‘동결’을 즉각적인 긴장완화의 표시로, 영변 5MW 원자로의 가동 뿐 아니라 두개의 훨씬 규모가 큰 원자로 건설을 유보하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힐은 북한의 모든 핵 능력의 폐기와 직접 연결된 준비단계로서만 ‘동결’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기존 미국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한국 역시 동결을 폐기의 준비단계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번 회담에선 ‘동결’의 의미에 관해 명시적으로 밝히진 않았다.

개인적 견해로는, 플루토늄 추가생산과 재처리 중단에 미국과 한국의 제1 우선순위가 두어져야 하고, 이 문제가 먼저 협의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추가적인 북-미 양자 그리고 6자회담을 통해서, 미-북 관계정상화와 핵 폐기를 향한 단계별 행동의 과정을 협상해야 한다.

한국의 대북 전력지원 제안은 회담의 긍정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도움을 줬지만, 그 범위가 너무 좁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의존하기 보다는 남북한이 상호 의존하는 방식의 더 광범위한 에너지 협력문제를 논의하는 쪽으로 한국은 나가야 한다. 대북 전력지원 방안은 한국이 북한에 의존해야 하는 다른 방안들과 결합될 수 있다. 가령 사할린이나 시베리아에서 북한을 통해 한국으로 오는 가스관 사업이 그런 예이다. 한국은 제네바 핵합의에 따라 2기의 경수로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북한 금호지구에 천연가스를 동력으로 하는 발전소를 짓는 걸 도와줄 수 있다. 금호의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데 막대한 투자를 하고서도, 한국이 이제 그 투자를 완전히 폐기하려는 건 말이 안된다. 에너지 협력은 남북 화해 뿐 아니라 완전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고리다. 물론 미-북간 관계정상화 없이는 어떤 핵문제 해결도 이뤄질 수 없다는 건 당연하다.

셀리그 해리슨(미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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