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자매들과 통일의 춤 추고 싶다”
“배화여고 호두나무는 아직도 그대로니? 우리 음악실에 피아노 6대가 있었는데, 아직 있니? 우리 집이 휘문고 뒤에 있었는데 휘문고는 아직 그대로 있니?” 작고한 언니 연구씨 자리 대물림모교 배화여고 이화여대 못가봐 서운
“통일 때까지 살아 있으라” 당부 말투엔 아직 서울 억양이 남아 있었다. 조선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여원구(78) 의장. 지난 13일 밤 평양 양각도 국제호텔에서 열린 ‘2005 남북여성통일행사’의 남측 답례연회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1947년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암살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자녀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한 딸이다. 고혈압 등 숙환으로 이번 회의에 참석 여부가 불확실했던 그는 만찬장에서 배화여고 후배인 한국염 목사, 이화여대(당시 이화여전) 후배인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을 만나 반가워하며 모교 소식부터 물었다. 특히 그는 14년 전인 1991년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토론회 참석차 서울에 왔을 때 모교인 이화여대를 가보지 못했던 것을 지금까지 안타까워했다. “(남한 정부가)나를 학교에 못 가게 했지. 날짜도 안 잊어버려. 1991년 11월24일. 학교 다닐 때 언니는 영문과, 나는 철학과를 다녔어.” 여 의장은 현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여성동맹(여맹) 박순희 위원장과 함께 북한 최고위급 여성으로 꼽힌다. 국제외교분야 전문가인 언니 여연구 중앙위 의장(96년 사망)의 공식 직함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나이 탓에 거동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에 나가 일을 한다고 했다. 여 의장은 모교의 추억을 떠올릴 때와 달리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고위직 인사답게 원론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여성들이 만나게 된 건 6·15 공동선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느라 김대중씨도 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열어가자는 얘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몽양이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대상에서 제외되었다가 지난 2월 비로소 남한 정부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것에 대해 소감을 묻자 그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다”면서도 “이쪽(북한)에서는 벌써 받을 인정을 다 받았다”며 남한 정부가 뒤늦게 아버지의 공훈을 인정한 데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반면 이번 남북여성통일행사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여 의장은 “이렇게 여성들을 만나니 친자매 같고, 벌써 통일의 광장에 서 있는 기분”이라며 “통일이 돼 함께 춤을 췄으면 한다”고 말했다. 남에 두고 온 동생 려익구(10촌)씨 등 친척들 얘기가 나오자 “내가 일을 잘 못해서 아직 통일이 안 됐다. 통일이 될 때까지 살자고 전해 달라”고 했다. 그는 이번 행사에 참석한 남쪽 여성대표단에게 “우리는 서로 한 핏줄, 한 민족이니 여성들이 조국 통일을 위해서 전진해 달라”며 “여성은 아이를 낳고 교육을 시키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임무가 더 크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여 의장은 1946년부터 8년간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뒤 1954년부터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원을 지냈으며 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글·사진 평양/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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