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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아리랑 지난 1일 저녁 평양 5·1 경기장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을 관람한 남쪽 참관객들이 남북 단일기를 흔들고 있다. 평양/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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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일 새벽 4시30분, 경기 일산 집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며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침 7시까지 인천공항 A~B 출발구역에 집결하라는 안내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려앉는 눈꺼풀을 치켜올리며 8시50분 출국 절차를 마치고 ‘아시아나’ 티켓을 들고 탑승구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눈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행기는 북쪽의 ‘고려민항’이었다. 아시아나가 일종의 대행사 역할을 한 셈인데, ‘반갑습니다’라며 활짝 웃는 안내원 뒤로 낡고 비좁아 보이는 좌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1일부터 3일까지 2박3일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의 ‘광복 60년 기념 평양 문화유적참관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평양 방문에서 북쪽과의 첫 대면은 이렇게 시작됐다.
출국 절차 때는 ‘아시아나’ 티켓, 정작 타고 갈 비행기는 ‘고려민항’
<한겨레>쪽에서는 취재기자로 나와 북한 예술 전문가인 박영정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 회사 선배인 장철규 사진부 기자 등 이렇게 셋이 평양길에 올랐다. 이번 행사에는 동명왕릉, 보현사 등의 문화유산 관람과 만경대, 개선문, 주체사상탑 등 북한이 내세우는 주요 시설 방문도 있었지만, 핵심은 북한이 자랑하는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관람이었다. 전문가를 취재진에 합류시킨 것도 <아리랑> 관람기가 칭찬과 폄하를 왔다갔다 하지 않고 겉핣기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450만원이라는 회삿돈을 들여 평양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이번 <아리랑> 공연을 총연출한 김수조 피바다가극단 총단장의 인터뷰 성사도 불확실했다.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언제든 바뀔 수도 있는 게 남북 교류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평양에 도착했다는 들뜸도 잠시, 양각도호텔에서 점심을 먹자마자 인터뷰와 관련해 약속한 사람과 ‘접선’을 했다. 인터뷰 성사 여부에 대해 아직도 북쪽에서 연락이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며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30여분, 책임자급 안내원이 찾아왔다. <한겨레>쪽에서 김수조 총단장의 인터뷰 질문지를 미리 보냈는데, 김수조 총단장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는 거였다. 인터뷰가 성사됐다는 말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자, 안내원은 추가로 송석환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부위원장도 함께 온다고 알려줬다. 송석환 부위원장은 <아리랑>을 총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 문화성 부상을 지낸 북쪽의 고위급 인물이다. 예우상으로는 장관급이고, 남쪽과 비교하면 사실상 차관급에 해당한다. 북쪽에는 내각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밤 11시 넘어서까지 취재 인터뷰 위해 북 출연진 ‘대기’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배우 네명도 함께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남쪽을 두번이나 방문해 남쪽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낯이 익은 리혜경(25) 여성취주악단 주지휘수와 피바다가극단 인민배우 조문규(35)씨였다. 다른 무용배우 한명과 배경대(카드섹션) 학생도 시간이 나면 인터뷰하자고 했다. 의외의 소득에 흡족해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북쪽 안내원은 “우리도 성과가 있어 좋다”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인터뷰 시간은 아리랑 공연이 끝난 직후인 9시30분부터 11시까지로 잡았다. 인터뷰 시간이 충분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것만 해도 북쪽에서 상당히 배려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무리하게 더 요구를 하지는 않았다.
남북관계에서 언론에 대한 불신이 큰 탓에 인터뷰 질문이 미리 조율돼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김수조 총단장의 경우 평양에 오기 전 질문지를 보냈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지만, 송석환 부위원장과 배우들의 인터뷰를 위해서 부랴부랴 질문지를 만들어 안내원에게 전달했다. 송석환 부위원장과 얘기를 하고 돌아온 안내원은 조선노동당 창건 60돌과 관련된 질문은 하지 말았으면 뜻을 전해왔다. <아리랑> 총기획자로서 <아리랑>과 관련해서만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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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저녁 평양 5·1경기장에서 연인원 10만여명이 참여해 열린 공연 후반부에 남북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평양/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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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공연은 저녁 8시부터 9시20분까지 80분 동안 진행된다. 북쪽 안내원은 7시30분쯤 미니버스를 이끌고 양각도호텔로 취재진을 태우러 왔다. 입장할 때 번잡스러움을 피하게 해주기 위한 배려였다. 남쪽 관람객들과 함께 주석단 바로 옆에서 <아리랑>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북쪽 관람객 지역인 주석단으로 넘어가 1층에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자 김수조 총단장과 송석환 부위원장, 그리고 배우 4명이 들어왔다.
북 ‘로동신문’도 궁금해한 사실 남쪽 언론에 솔직히 알려줘
김수조 총단장은 일흔넷의 나이에도 아주 정정해 보였다. 그러나 다소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아리랑과 관련해 남쪽 언론과 전면적으로 인터뷰한 것은 처음이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 말미에 “피바다가극단을 이끌고 남쪽에서 공연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표정이 환해지면서 “아, 있지요”라며 적극적인 의사를 보였다. 김 총단장은 <피바다> 이외에도 사계절 동안 인민들의 생활과 미풍양속을 담은 무용조곡 <계절의 노래>, 봉선화 노래를 주제로 한 <봉선화> 등이 있다고 했다. 만약에 <피바다>가 혹시 남쪽 사람들한테 거부감을 준다면 다른 ‘부드러운’ 작품도 얼마든지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송석환 부위원장은 남쪽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는 편이고, 워낙 거물급 인사라 그런지 인터뷰 내내 여유가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을 조목조목 조리있게 했다. 송 부위원장은 인터뷰를 녹음하는 것도 선뜻 승락했다. 게다가 <아리랑> 공연에 연 10만명이 참여했고 실제 인원은 두세번 중복출연하는 사람을 빼면 6만5천명이다, 배경대는 1만8천명이다, 2002년과 비교해 98%의 공연 인원이 교체됐다 등등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남쪽의 시각에서 보면 사실 이런 내용은 아무 것도 아니다. 기자들 말로 하면 ‘기사 가치’가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로동신문>이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인 <조선신보>에도 이런 구체적인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 예술 전문가들은 무척 궁금해 했던 내용이다. 남쪽 언론에 이렇게 구체적으로 얘기한 것은 파격적이었다.
김수조 총단장과 송석환 부위원장의 인터뷰를 하느라 1시간30분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조문규, 리혜경 두 배우의 인터뷰는 짤막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11시가 지난 탓에 피곤함을 무릅쓰고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던, 배경대에 참여했던 중학생 학생과 다른 무용배우의 인터뷰는 하기가 힘들어졌다. 남쪽이라면 막무가내로 밀어부치겠지만, 일정 정도 북쪽의 특성을 존중해 줄 수밖에 없어 “정말 미안하다, 나중에 또 보자”는 말로 아쉬움을 대신하고 응접실을 나왔다.
북 안내원들, 충돌 피하고 ‘사실 확인’ 적극 도와줘
북쪽 안내원들은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 많은 배려를 했다.
그런데 인터뷰를 마치고 양각도호텔로 돌아오는 도중 2002년 실제 <아리랑> 공연 참여 인원이 몇명인지는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2002년과 2005년의 ‘동원력’을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내원은 확인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서울로 출발하는 날인 3일 오전까지 답이 없었다. 고려호텔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평양공항으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북쪽 안내원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2002년에는 7만명이 참여했다고 전했다. 올해엔 조명 등 보조 인력까지 합해 실 참여인원이 6만5천명이었으니, 2002년에 비해 5천명 정도가 줄었음을 알 수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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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저녁 공연이 펼쳐진 평양 5·1경기장에서 북한 주민들이 손을 흔들며 남쪽 참관단을 환영하고 있다. 평양/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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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북쪽의 안내원들은 의외로 남쪽 언론에 대해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로 대해 주었다. 물론 <한겨레>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일 때는 북쪽 나름대로의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이념적인 문제는 충돌을 피하려는 자세가 역력했고, ‘사실확인 요청’에 대해서는 정말 도와주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북쪽 안내원’이란 표현을 썼는데, 이들은 북쪽 민화협에 소속돼 있다. 2000년 6·15 이후 남북 민간교류를 북쪽에서는 민화협이 전담하고 있다. <한겨레>와 인터뷰를 책임진 안내원은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으로, 이 안내원을 포함해 대부분의 안내원들은 북쪽에서 엘리트에 속한다. 그만큼 ‘사상성’이 투철하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동안 꾸준한 남쪽 사람들과의 접촉으로 비교적 남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남쪽 사정을 말하면 수긍하고, 서로 얘기가 통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9월26일부터 시작된 민간 대북지원 단체의 방북 행렬은 아마도 이런 변화를 더욱 촉진할 것이다. 7000여명이 한달 동안, 매일 수백명씩 북쪽을 방문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아리랑> 공연이 끝나면 밤 11시 무렵 양각도호텔 47층 ‘스카이 라운지’에서 남쪽 관람객과 북쪽 안내원들의 간단한 술자리가 마련되곤 한다. 거기서 주고받는 이런 저런 얘기들은 주로 결혼했냐, 아이가 몇 살이냐 등등 신변잡기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런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이 점점 넓어질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 이번 남쪽 관광객의 <아리랑> 관람의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겨레> 정치부 이용인 기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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