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방문길에 나선 재일동포 정정순 할머니.
|
[이제훈기자의 방북기]1. ‘4년 만에 다시 찾은 평양’길의 정정순 할머니
한겨레 정치부 이제훈 기자입니다. 저는 최근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평양은 이번이 세번째입니다. 지난 2000년 10월 조선노동당 창건 55돌에 맞춘 ‘한겨레 방북 취재단’의 한 사람으로 처음 갔고, 2001년 8월 남북공동행사 공동취재단의 일원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4년 만의 평양 나들이인 셈입니다. 요즘 평양에 다녀온 분들이 많죠?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관람을 주 목적으로 한 ‘평양참관단’의 일원으로요. 이 분들은 인천↔평양 직항로를 이용하시죠. 전 인천→선양→평양 이동로로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의료법인 을지병원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북쪽의 민족화해협의회와 올해 초 합의해 진행해온 평양의 조선적십자종합병원 현대화 사업 현장 방문팀에 묻어서 취재차 다녀온 것이죠. 4년 만의 평양 방문 때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이전의 방북 경험과 비교하며 몇차례로 나눠 쓰려 합니다. 4년간 평양은 무엇이 달라졌고,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지난 12일 오후 중국 선양공항에서 고려항공에 올랐을 때, 가슴이 뛰었습니다. 지난 4년 평양은 무엇이 달라졌고, 변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처 이후 많은 게 변화하고 있다는데…. 비행기에 오르니 운좋게도 제 자리가 창가였습니다. 선양↔평양 노선을 운행하는 비행기는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비행 고도도 낮죠. 그래서 창가에 앉으면 압록강을 경계로 한 중국과 북한의 산하를 볼 수 있습니다. 경험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그때 기분 참 묘합니다. 한 핏줄이라는 게 뭔지, 조국의 산하라는 게 뭔지….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옆자리의 할머니가 계속 말을 거는 겁니다. 창밖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요. 처음엔 좀 짜증이 났습니다. 그러나 얘기가 조금 진전된 뒤로는, 오히려 제가 할머니께 줄기차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익산 출신의 71살 할머니, 8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동포 할머니의 이름은 정정순, 일흔 한 살이셨습니다. 할머니는 일본 나가노에 사시는데, 함경북도 회령에 사는 남동생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할머니의 남동생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조국 귀환 사업’의 일환으로 북에 간 재일동포였습니다. 할머니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나셨답니다. 여덟살 되던 해 일가족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아버지께서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며 일본행을 결행하셨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많이 배우지 못하셨답니다. “그때 일본에서 조선사람이 많이 배우는 게 쉬웠겠어?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할머니는 저한테 세관 신고서와 입국 신고서를 대신 써달라고 하시더군요. 써드렸더니 “고마워요”를 연발하십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했습니다. “한국은 자주 가는데, 북엔 자주 오게 되지가 않아.” 그러면서 할머니는 묘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북의 남동생을 만나러 오는 건, 10년 만이랍니다. 북녘 조카가 얼마 전에 결혼했는데, 남동생도 보고 새 조카 며느리도 볼 겸 해서 먼길을 나섰다는군요. 할머니는 일본에 같이 사는 여동생, 남동생과 함께 왔답니다. 세 분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짐이 큰 가방으로 서른 개랍니다. 어마어마하죠? “별의 별 것을 다 싸왔어. 양념도 다 가져왔지. 동생, 그리고 북에 있는 애들한테 맛있는 것 좀 만들어 주려고. 아무래도 북엔 물자가 부족하잖아.” 서울에 있는 피붙이를 만나러 올라오는 남녘 시골의 부모님들이 떠올랐습니다. 세 사람이 일본서 친척에게 주려고 가지고 온 짐 ‘큰 가방 서른개’ ‘그동안 일본에서 어찌 사셨냐?’고 여쭸습니다. “말도 마, 서른 셋에 애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지금은 살만 해. 애들도 다 잘 자랐고. 아들 둘은 의사야.” 할머니는 처음엔 손사래를 치더니, 나중엔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식 자랑에 신이 나셨습니다. “우린 집에선 우리말만 써. 일본말은 절대 쓰지 않지. 아버지가 그러셨어. 일본놈들이 한 일을 잊으면 안 된다고. 손주들도 다 우리말 쓰지.” 할머니는 “아직은 일본 며느리 들일 생각 없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할머니가 험난했던 지난 세월을 어떻게 지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몇번 여쭤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시더군요. 다만, 할머니가 가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느낌은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꽤 오래전에 나고야에 ‘금강사’라는 절을 짓는 데, 10억원을 기부하셨답니다. “늙은 이들이 부담없이 편히 쉬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기자 양반도 일본에 오면 한번 들러. 경치 좋고 조용하고 참 좋아”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난 살면서 한 게 별로 없어”라며 “나중에 죽어서 ‘넌 뭐했냐’고 물으면, ‘절 지었어요’라고 말하려고.” 하시더군요. 할머니는 배운 게 없다지만, “사람이 입에 풀칠 할 수 있으면 세상 일도 생각하며 살아야지”라고 말씀하실 만큼 건강하십니다. 할머니는 열흘 동안 북에 머물 계획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2∼3일은 남동생네 식구들을 평양으로 불러 맛있는 것도 먹이고, 평양 구경도 할 거랍니다. 그리곤 비행기를 타고 회령으로 가신답니다.
|
정정순 할머니는 “일본에 사는 조선사람들이 한국말을 잊지 않은 건 총련 덕이야.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인정해야 해.” 라고 말했다
|
“북의 동생네랑 상의해서 쌀가게라도 하나 차려 주려고 해” “요즘엔 북에서도 장사를 꽤 한다고 하던데, 이번에 동생네랑 상의해서 쌀가게라도 하나 차려 주려고 해. 그거면 먹고 사는 데 문제 없지 않겠어?” 할머니는 지금껏 북에 있는 남동생의 생활비를 보내왔답니다. “총련 사람들이 북에 자주 가거든. 일년에 두세번 그 사람들 편에 동생한테 돈을 보냈지.” 할머니의 자제분들은 ‘북에 있는 동생만 바라보는’ 할머니가 좀 걱정이었나 봅니다. ‘이젠 그만하시라’고 성화라는 군요. “나 죽으면 내 동생은 누가 챙기겠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잖아. 나 없어도,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도, 동생이 먹고살 만한 기반은 만들어 줘야지.” 제 생각엔 할머니가 10년 만에 북녘으로 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인 것 같았습니다. 흔히 ‘재일동포 북송사업’이라 불리는 일은 1959년부터 60년대 초반에 정점에 이르렀고, 84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사업을 통해 재일동포 8만6천여명과 그 일본인 가족 6800여명이 새 생활을 찾아 일본 니가타에서 북녘 청진으로 가는 배를 탔죠. 이 일련의 대이동을 남에서는 ‘북송사업’이라 부르고, 북에서는 ‘귀국사업’이라 부릅니다. 일본 동포사회에서는 ‘귀환사업’이라고 하죠. 처지와 시각에 따라 같은 사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도 참으로 다릅니다. 식민지 경험과 분단의 현실이 반영된 것일 겝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재일동포 북송사업’의 최초 발의자는 북한이나 총련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 호주국립대 교수가 국제적십자사 문서관에서 기밀 지정이 해제된 자료를 찾아내 <론자>라는 잡지에 실은 글을 보면, 일본 정부의 주도 아래 일본적십자사가 1955년에 국제적십자사에 보낸 편지가 이 사업의 출발점이었답니다. ‘가난하고 귀찮은 재일동포의 일본 밖 추방’ 시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전북 익산이 고향인 할머니의 남동생이 비록 조국의 북녘이긴 하지만 함북 회령에 정착하는 걸 고향 회귀라고 할 수는 없겠죠.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잊고 지내온 이산가족인 셈입니다. “일본 사는 조선사람들이 한국말을 잊지 않은 건 총련 덕…이건 인정해야” “일본에 사는 조선사람들이 한국말을 잊지 않은 건 총련 덕이야.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인정해야 해.” 할머니는 재일동포들이 한국말을 잊지 않은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말글살이에 겨레의 얼이 담겨 있다는 뜻이겠죠. 정확하게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할머니네 가족도 전엔 총련쪽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지금은 민단쪽인 것 같더군요. “일본에서 조선적을 갖고 사는 게 참 힘들어요. 얼마 전에 민단으로 바꿨어.” ‘조선적’은 일제시대 징용 등으로 일본에 간 조선사람들이 해방 뒤에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을 때, 유지하게 되는 국적입니다. 역사에서 사라진 ‘조선’이라는 국적을 유지한다는 거, 간단한 일이 아닐 겁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지만, ‘조선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적과는 다른 것입니다. ‘조선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과는 달라 할머니 가족이 모두 민단쪽으로 바꾼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평양 순안공항에 내려 할머니께 작별 인사를 할 때 보니, 일본에서 할머니와 함께 온 남동생은 양복 깃에 ‘초상’을 달고 계시더군요. ‘초상’이란 북쪽 사람들이 옷깃에 달고 있는 김일성 주석 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얼굴 사진이 담긴 배지의 북한쪽 표현입니다. 할머닌 얼마전 서울에 오셔서 지금은 역사박물관이 된 서대문 형무소를 둘러보셨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한 거 있지. 험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 그래서 나오는 길에 형무소쪽에 일본 돈 100만엔을 내놨어. 영혼들을 달래는 일에 쓰라고.” 겨레의 슬픈 역사의 희생자라고 해야 할 할머니는 겨레의 아픈 역사를 위무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거듭 죄송한 일입니다. 헤어질 때 할머니께서 넋두리처럼 한마디 하셨습니다. “남쪽은 잘 살잖아. 이제 북쪽만 제대로 살면 우리나라는 다 괜찮은데….” 할머니에겐 남한도 북한도 다 ‘우리나라’였습니다. 할머니에겐 가족이 사는 곳 모두가 ‘우리나라’였습니다. 할머니에겐 분단도 이데올로기도 별무 소용이었습니다. 글·사진/<한겨레> 정치부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