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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3 10:22 수정 : 2005.10.23 10:22

지난 92년 제 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연형묵 북한 총리가 정원식 총리와 만찬석상에서 밝은 표정으로 건배하고 있다. 연합

22일 지병으로 사망한 북한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측근으로 북한 국방공업을 이끌어온 실세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난 연 부위원장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체코의 프라하 공대를 유학한 이후 노동당, 정무원(현 내각), 국방위를 오가면서 북한 국방공업과 경제건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항일빨치산 유자녀로 김일성 주석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그는 30대인 1968년부터 당 중공업부 부부장과 부장, 노동당 비서를 역임했으며 1975년 정무원 부총리 겸 기계공업위원장와 제1부총리, 1988년 정무원 총리에 임명됐다.

1967년부터 현재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1970년 노동당 제5차대회에서 당중앙위 위원으로 선출된 이후 당중앙위 정치위원회 위원, 정치국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북한이 만성적인 경제난에 접어들면서 1992년 총리에서 해임돼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된 뒤 자강도 당 책임비서로 내려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군수공장이 밀집한 것으로 알려진 자강도에서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면서 중소형발전소 건설 등 새로운 정책을 추진, '강계정신'이라는 신조어까지 유행시키며 1998년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를 통해 국방위원으로 중앙무대에 복귀했다.

2003년부터는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김정일 위원장과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에 이어 '넘버3'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연 부위원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및 러시아 방문에 동행했으며 북한을 방문하는 남한과 중국, 러시아 고위인사의 면담 자리에도 거의 빠짐없이 배석하는 등 정치적 위치를 반영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1990년부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에 북측 수석대표로 빠짐없이 참가해 남북기본합의서를 타결시킨 인물로 남측에도 잘 알려졌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는 고별오찬과 공항환송 행사에 참석했으며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6.17면담에 배석자로 참석했다.

이 같은 화려한 경력을 두루 갖춘 연 부위원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에서 북한의 경제문제, 중.러와 외교관계, 남북관계 등에 대해 조언을 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러시아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를 비롯 평소 연 부위원장을 '나의 동지', '나의 친구'라고 부르면서 각별한 신임을 표시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올해로 73세인 연 부위원장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채 최근들어 완치률이 낮은 췌장암으로 고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배려 속에서 2004년 11월 러시아에서 수술을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장용훈 기자 jyh@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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