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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31 17:03 수정 : 2005.10.31 19:39

지난달 26일 실시된 제1차 개성 시범관광에 참여한 관광객들이 고려시대 성균관을 살펴보고 있다. 개성/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개성을 다녀와서] 금강산·평양과 다른 ‘북의 어려운 결심’ 보여


지난 금요일(10월28일) 개성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넘어가서 오전에 개성공단 안에서 열린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한 뒤, 오후에는 개성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선죽교, 표충사, 고려민속박물관, 숭양서원 등 몇몇 유적지를 둘러봤습니다. 오가는 길에 개성 시가지와 주민들이 사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개성시는 아직 남쪽 사람들에게 본격 개방되지 않은 곳이어서 좋은 경험이 됐습니다. 앞으로 시작될 개성관광도 이번에 둘러본 코스가 기본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형편이 닿는 분들은 꼭 한번 가보시길 바랍니다.

개성 북쪽 천마산 자락 오조천 상류에 걸린 박연폭포. 범사정 밑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폭포 밑의 소가 고모담, 왼쪽에 보이는 바위가 용바위다. 박연은 폭포 위에 있는 바가지를 닮은 소를 말한다.

◆ 개성시와 주민들

유적지보다 더 궁금한 건 개성 시가지와 주민들이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개성시의 전체 면적은 1308.6㎢로, 서울 면적의 2배 남짓 됩니다. 인구는 38만명 정도고요. 남쪽 도시들에 비하면 훨씬 저밀도지요. 개성공단은 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에 바로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8㎞ 가량 가야 시가지가 나옵니다. 시내에 사는 인구는 10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시내로 가는 길 옆의 민가들은 대개 벽돌 담에 기와나 슬레이트 같은 것으로 지붕을 얹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 농촌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이지요. 좌우로 펼쳐진 야산에 나무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과거 우리 모습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시내로 들어서자 도로가 넓찍해졌습니다. 간선도로는 다 그렇더군요. 서울 거리로 치면 6~8차선쯤 되는 도로에 중앙분리선만 그려놓았습니다. 길 가에는 밥, 신발, 고추장 등 각종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공장과 도서관, 학교 등 공공시설, 3~5층 높이의 공동주택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인도의 폭도 서울 거리의 2배 이상 됐습니다. 10층 이상 되는 아파트도 간간이 보였습니다. 개성은 직할시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작았습니다. 이번 행사를 위해 평양에서 왔다는 북쪽 사람도 그렇게 느꼈다고 하더군요. 함흥이나 신의주가 더 클 거라고 했습니다.

시내도 그렇고 주변 농촌지역도 그렇고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로 치면 70년대 초중반쯤의 분위기라고 할까요. 40대 이상이라면 그때의 한국 중소도시와 농촌이 어땠는지 짐작이 가리라고 봅니다. 건물은 낡았고 둔탁해 보였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은 찾기 어려웠고요. 신규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할까요. 차량 통행은 별로 없는 대신 자전거는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돌아오는 시간이 퇴근 때였는지 수백명의 사람이 반쯤은 자전거를 타고 반쯤은 걸어서 지나가는데, 서울의 1970년대 공단 주변 모습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날씨가 그다지 쌀쌀하지 않은데도 두터운 옷을 입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난방이 어려운 것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로는 깨끗했습니다. 공해가 없어서인지 가로수로 심어놓은 은행나무도 단풍이 예뻤습니다.


금강산에 이어 개성 시범관광이 시작된 26일 오전 관광객들이 개성 선죽교를 살펴보고 있다. 개성/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 유적지

5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고려의 수도였던 위풍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유적지와 유물도 잘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공식 오찬이 있었던 시내 자남산여관(호텔)은 선죽교 부근의 숲 속에 있었습니다. 고기, 생선, 떡(우메기), 과일, 인삼 등 이런저런 음식이 많이 나왔는데, 대체로 입맛에 맞았습니다. 관광객을 상대로 숙식을 제공할 만한 곳이 이곳 외에는 별로 없다고 하더군요.

선죽교는 자남산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로, 정몽주가 철퇴에 맞아 죽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길이가 8.3인 작은 다리이지요. 옆에는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이 있는데, 한석봉이 글씨를 썼답니다. 부근에 있는 표충사도 그를 기려 만든 사당이고요. 정몽주가 살던 집터에는 세워진 숭양서원에도 갔습니다. 조선 선조 때인 1578년 사액을 받았다는군요. 개성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정몽주인 듯합니다.

고려 말기에 국가 교육기관으로 성균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건물과 부지를 이용해 고려민속박물관을 만들었는데, 청자와 백자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각종 유물을 전시해놨습니다. 최소한 수백년은 돼 보이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도 볼 만했습니다. 가보지는 못했지면 박연폭포도 좋다고 하더군요. 평양 번호판을 단 버스도 몇대 봤습니다. 중국을 통해 온 관광객이라고 하더군요. 유적지 앞에서는 술과 그림 등 소박한 기념품을 팔았습니다.

금강산에 이어 개성 시범관광이 26일 시작됐다. 사진은 고려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개성 성균관이다. 연합뉴스

◆ 개성공단

지금은 1단계 가운데서도 시범단지만 완공돼 11개 기업이 가동 중입니다. 북쪽 노동자 4천8백명, 남쪽 인력 5백명 등 모두 5300명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일인데, 앞으로 공단과 시가지 개발이 마무리되면 모두 2천만평 규모가 됩니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22배 남짓하지요.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는 시범단지 안에 만들어졌습니다. 3층짜리 건물의 2층은 남쪽이, 3층은 북쪽이 사용합니다. 양쪽의 인력이 상시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사무소가 만들어진 것 자체가 경협에서 큰 진전입니다.

공단에 입주한 남쪽 의류업체인 신원의 공장을 둘러봤습니다. 북쪽 여성 노동자 400명이 열심히 천을 잘라 재봉틀을 돌리고 마감 작업을 하며 옷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작업환경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북쪽 노동자는 모두 개성지역에 살고 있으며, 버스나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다고 하더군요. 신원쪽 관리자에게 물어보니, 베트남인이나 중국인에 비해 일을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생산성도 높다고 했습니다. 만들어진 옷을 당일 남쪽의 매장에 내놓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클 것으로 봅니다.

물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불편한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서울에서 개성까지 거리는 70㎞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 광화문에서 출발해 공단까지 가는 데 2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이유는 정해진 시간에 군사분계선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국경을 통과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갈 때는 남쪽에서 출국 - 북쪽에서 입국, 올 때는 북쪽에서 출국 - 남쪽으로 입국 절차를 거쳐야 하는 거죠. 불가피한 면도 있으나 앞으로는 이런 절차도 대폭 개선돼야 할 겁니다.

버스로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왕복 4차선 도로가 공단지역까지 깔려 있습니다. 군사분계선에는 특별한 표시 없이, 남쪽에서 지날 때는 ’여기서부터 개성시입니다’라는 팻말이, 북쪽에서 올 때는 ’여기서부터 파주시입니다’라는 팻말이 서 있는 것이 흥미롭더군요.

◆ 남북 경협의 앞날

개성공단과 개성 시내를 보고 난 뒤 든 생각은 ‘북한이 정말 어려운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선 서울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남북 모두 군사 요충지입니다. 북쪽이 이 요충지를 개방하고 북방한계선 부근 2천만평의 사용권까지 내놓은 건 군사적인 면에서만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지역에서 무장해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거꾸로 우리가 남방한계선 남쪽 파주지역 땅 2천만평을 북쪽에 제공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군사분계선 남쪽으로는 군사시설이 많았지만, 북쪽으로 개성 시내까지 가는 동안 거의 군사시설을 볼 수 없었습니다. 개성공단 자체가 평화를 진전시킨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관광사업의 형태로 개성 시내와 주변 지역을 개방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양과는 달리 개성은 지금까지 바깥 사람에게 보여주기를 꺼려했던 곳입니다. 뒤처진 모습이 노출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외부의 물결이 몰려오는 걸 경계하는 면도 있었겠지요. 남쪽 주민을 대상으로 관광사업을 한다는 건 이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뜻이지요. 주민이 별로 살지 않는 금강산 지역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북한이 이를 통해 얻으려는 건 1차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겠지요. 물론 하루아침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개성공단에서 가동하는 기업들은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북쪽 노동력은 기능적으로도 우수하고 의욕도 높습니다. 지금은 원부자재를 모두 남쪽에서 가져가지만 앞으로는 북쪽에서 자원을 개발해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북쪽도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산업 기반을 갖춰나갈 수 있지요.

중요한 건 서로 긴 안목과 신뢰를 갖고 해나가는 것이지요. 단기간에 많은 걸 이루려다가는 오히려 실망할 수도 있을 겁니다. 경협 진전이 남북 화해와 평화 구조 구축에 주는 영향은 크리라고 봅니다. 서로 ’윈-윈’할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면 화해와 협력이 자라날 수밖에 없지요.

김지석 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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