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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18회 민주주주의 ‘이데알튀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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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화두
존슨부터 트럼프까지 미대통령 10명째
“미국 민주주의는 특유의 역사적 산물”
“막스 베버 통해 학문적 방황 끝내”
미네소타대 독일계 마틴데일 교수
베버에게 직접 배운 ‘사회학’ 강의
“나만의 과학철학적 연구방법론 찾아”
베버 제시 ‘이데알튀푸스-이상형’ 따라
“커리캐처하듯 ‘민주주의 이상형’ 구성”
한-미 비교 ‘민주주의 성취도’ 평가
‘자유·평등·권력분립·동의·설득’
계몽주의 ‘사회계약론’ 5개 관점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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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18회 민주주주의 ‘이데알튀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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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1965년 유학 이래 지금까지 55년째 36대 린든 존슨부터 45대 도널드 트럼프까지 모두 10명의 미국 대통령 시대를 살아왔다. 사진 위키피디아, 일러스트 송권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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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현장에서 민주주의가 유린되는 광경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나는 서울대 강의실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하나의 모범으로 배웠다. 그런 미국 민주주의가 이승만 정부의 폭정으로 유린되는 모습을 보면서 거리로 뛰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함께 스크럼을 짜고서 경무대로 향한 친구들도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다.
그 뒤 1965년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이상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나는 선망했던 미국 민주주의를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 기간은 린든 존슨부터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까지 무려 10명의 대통령을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방인의 시각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거리를 두고서 관찰해왔다. 또한 나는 정치학 교수의 시각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학문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4·19 한복판에서 던졌던 질문을 되묻고 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내가 관찰해온 민주주의는 미국 특유의 민주주의다. 미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탄생한 역사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한국에서 선망하고 답습해야 할 민주주의가 결코 아니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한국이 처한 특수한 환경에서 직면한 특수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처방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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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사진)의 연구방법론인 ‘이데알튀푸스’(이념형)를 차용해 미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분석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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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막스 베버와 만나면서 나는 오랜 학문적 방황을 끝내기 시작했다. 미네소타대학 사회학과 돈 마틴데일(1915~85)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베버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마틴데일은 베버로부터 직접 사회학을 배운 독일계 미국인 학자였다. 나는 베버를 공부하면서 내가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탐구할 수 있었다. 내가 정치학 공부를 시작한 까닭은 정치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가급적 처방책까지 마련하고 싶어서였다. 베버는 나의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도 베버가 사회과학적 연구 수단으로 제시한 ‘이데알튀푸스’(Idealtypus: 이념형·이상형)는 내가 과학철학적 맥락에서 독자적 연구방법론을 개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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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는 미네소타대학 돈 마틴데일(사진) 교수의 사회학 강의를 통해 막스 베버의 이론을 알게 되면서 학문적 방황을 끝내고 나름의 연구 체계를 세웠다. 사진 미네소타대학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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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먼저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데알튀푸스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데알튀푸스를 빠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물의 캐리커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캐리커처는 그 인물의 특징적 부분을 과장해서 부각시키고 나머지 부분은 거의 생략해 버린다. 예컨대 에이브러햄 링컨의 캐리커처를 보면 구레나룻, 진한 눈썹, 깡마른 얼굴 등을 유독 크게 강조한다. 따라서 캐리커처는 실제 모습과 동떨어진 추상적 구성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캐리커처는 한 인물의 특징적 면모를 선명하게 알려주는 장점이 있다.
이데알튀푸스도 캐리커처와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하고 유사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데알튀푸스는 역사 현실에서 부각시킨 특징적 부분을 중심으로 구성한 하나의 개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이데알튀푸스에서 ‘이데알’이 도덕적 이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이상’을 뜻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구성해보면, 그것을 미국 민주주의와 비교할 수도 있고 한국 민주주의와 비교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 민주주의와 한국 민주주의가 각각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와 어느 정도 가까운지 아닌지를 분석해서 각국 민주주의의 성취도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둘을 비교해서 각자가 직면한 문제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을 찾아서’ 이번 회에서는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구성하는 데 역점을 두고자 한다. 여기에서 구성한 이데알튀푸스를 수단으로 미국과 한국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내용은 다음 회에 담고자 한다. 이런 내 연구 방식이 널리 활용되어 여타 국가의 민주주의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연구가 꾸준히 축적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민주주의는 계몽주의 시대에 탄생했다. 주지하듯 계몽주의는 17세기 과학혁명을 계기로 창출된 근대 세계관에서 배양되었다. 계몽주의의 요체는 크게 3가지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성·과학·개인이 각각 그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주도한 과학혁명은 중세 천년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대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운명을 개척하는 독립적 주체로 재탄생했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인간은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만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 재탄생한 인간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주체적 개인이었다. 이러한 속성을 지닌 계몽주의는 다양한 민주주의 사상가가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탄생한 민주주의 사상가들을 참조해 민주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구성할 수 있다. 거기에는 5가지 관점이 중요한데, 자유·평등·권력분립·동의·설득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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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서구 민주주의의 개념을 제시한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사인 존 로크는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에서 자유·평등의 개념을 정의했다. 왼쪽은 1697년 독일 화가 고트프리 넬러가 그린 존 로크의 초상화, 오른쪽은 네덜란드 망명 시절 집필해 1689년 익명으로 출판한 ‘통치론’ 초판 표지.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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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 필수적인 ‘자유’의 의미는 이른바 사회계약론(the social contract)을 통해서 확정되었다. 그 자유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중세 신권으로부터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다. 중세는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과학적 이성에 기초를 둔 계몽주의는 정치를 종교로부터 분리시켰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향유하는 정치적 자유 역시 종교로부터 자유를 의미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계몽주의를 배경으로 탄생한 민주주의의 존립기반이 곧바로 붕괴되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에서 요청되는 국가는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이제 통치자는 피통치자와 계약을 맺어서 선출되었다. 치자는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피치자와 체결한 계약에 따라 권력을 행사해야 했다. 따라서 피치자는 계약의 조건 내에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에서 향유하는 자유를 이해할 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자유는 결코 방종(licence)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허용된 자유를 방종으로 실천한다면 민주주의는 이내 아나키즘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18세기 자유주의 사상가는 자유와 방종의 차이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예컨대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그 점을 이렇게 강조했다. “자연상태는 자유의 상태이지 방종의 상태가 아니다. … 자연상태는 그것을 지배하는 자연법이 있는데, 모든 인간은 바로 그 자연법의 구속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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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턴이 1644년 영국 의회의 사전 검열에 대항해 허가 받지 않고 출판할 권리를 주장한 연설문 <아레오파지티카>(라틴어·법정과 의회의 기능)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핵심인 ‘언론·출판의 자유’를 설파한 선언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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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도서관에서 희귀서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1644년 존 밀턴의 <아레오파지티카> 초판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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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민주주의의 자유에는 저항권 내지 혁명권이 내포되어 있다. 치자가 사회계약에 따라 약속한 피치자의 자유를 수호하는 대신 그것을 유린했을 때 피치자는 그에게 저항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셋째, 민주주의의 자유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모두 포괄한다. 소극적 자유는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말한다. 예컨대 종교로부터의 자유, 국가의 폭정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해당한다. 반면 적극적 자유는 선택의 자유를 의미한다. 예컨대 투표에 참여해 정당을 선택할 자유 등을 말한다. 넷째, 내가 민주주의의 자유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언론의 자유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를 제공하는 구실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질식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존 밀턴도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언론의 자유를 이렇게 강조했다.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이해하고, 말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나에게 달라.” 그러나 언론의 자유가 언론의 방종으로 실천된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는 곧바로 아나키즘으로 전락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통상, 평등은 사회주의의 원칙으로 이해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도 평등을 요구한다. 로크 역시 <통치론>에서 “인류는 모두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로 태어났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평등이 보장될 때에만 민주주의의 요체인 다수결의 원칙이 유지될 수 있다. 또한 다수결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했기 때문에 반드시 ‘승복’을 요구한다. 다수결에 승복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평등한 인간의 다수가 결정한 사안에 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의 평등 그 자체를 거부하는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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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입법·사법·행정의 분리를 처음 제시했다. 미국은 1787년 필라델피아 비밀헌법회의에서 세계 처음으로 ‘삼권분립’을 헌법에 명시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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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1784년 출간하자마자 금서가 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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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권력의 분립을 요구한다. 권력은 통치에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그러나 역사는 권력이 독점되면 거의 예외 없이 남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치자의 권력이 남용되면 피치자의 자유는 보장될 수 없다. 따라서 통치에 필요한 권력은 인정하면서도 권력의 남용은 방지해야 하는 이율배반적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의 고전적 해법은 몽테스키외가 제시한 삼권분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 제11편 ‘헌법에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법’에서 입법·사법·행정을 분리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동의에 의한 정치를 뜻한다. 국민의 현명한 동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국민의 활발한 정치적 참여가 필요하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은 국민의 정치적 성숙도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정치교육 내지 시민교육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테마로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참여를 이해할 때 중산층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의 평화와 번영 등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계층은 대체로 중산층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상층의 일차적 관심사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반면 하층은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벅차기 때문에 국가의 장래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건강한 중산층의 존재가 필요하다. 중산층이 활동하는 시장의 문화가 민주주의의 문화와 대단히 유사한 속성을 지녔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에서 합리적 계산에 따라 상품을 고르는 행위는 선거판에서 합리적 판단에 따라 후보자를 선택하는 행위와 질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동의에 의한 정치는 국민의 동의를 얻어 제정된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서 법에 의한 지배, 즉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가 등장한다. 국민이 동의한 법에 따라 통치가 이뤄질 때 국민의 심정적 지지를 의미하는 정통성(legitimacy)을 확보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통성을 확보해야만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할 때, 그래서 정통성의 위기에 직면할 때, 그 민주주의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헌정주의는 국민의 준법 또한 요구한다. 국민이 자신이 동의해서 제정한 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이내 아나키즘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민주주의는 이성에 의한 설득을 요구한다. 주변의 각종 압력, 예컨대 권력·금력·정당 등의 압력에 밀려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합리적 설득 과정을 거쳐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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