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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30 12:20 수정 : 2019.12.30 12:35

박한식 교수는 북한 사회주의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려면 먼저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으로 이어진 사회주의이론의 기본 이념형(이데알튀푸스)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위탁을 받아 1848년 엥겔스와 함께 출간한 <공산당 선언>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주장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지난해 구술 인터뷰 방식 책 출간
‘남-북 갈라놓는 12가지 편견’ 정리
6개월만에 1만5천부 판매 ‘예상밖’
“북한에 대한 ‘편견 극복’ 갈증 확인”

‘사회주의 이데알튀푸스’ 이해부터

마르크스 ‘19세기 유럽 자본주의’ 전제
“빈부격차·계급 갈등·불평등 사회…
부르주아 맞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박한식 교수는 북한 사회주의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려면 먼저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으로 이어진 사회주의이론의 기본 이념형(이데알튀푸스)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위탁을 받아 1848년 엥겔스와 함께 출간한 <공산당 선언>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주장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길을 찾아서-21회 사회주의 이데알튀프스

나는 지난해 4월 <선을 넘어 생각한다: 남과 북을 갈라놓는 12가지 편견에 관하여>(부키)를 펴냈다. 우리의 생각을 옥죄는 갖가지 선을 넘어서서 북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자는 제안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약 6개월 만에 1만5천부가량 팔렸다는 출판사의 얘기를 전해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안타깝게 생각했던 문제를 인터뷰 형식으로 구술해 정리한 글인데 그토록 큰 호응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만큼 독자들 사이에 북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싶은 갈증이 높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증표가 아닐까? 그런 갈증이 내가 평생 갈구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을 여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독자들의 과분한 관심에 답례하는 의미도 담아서, 이 기회에 <선을 넘어 생각한다>를 쓰게 된 이론적 배경을 소개하고자 한다.

박한식(맨 왼쪽) 교수는 한국에서는 처음 나온 저술인 <선을 넘어 생각한다>(강국진 집필·오른쪽 둘째)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구술했다. 출간 한달 뒤인 2018년 5월 국회의원회관에서 ‘평화통일연대포럼’에 이어 출판기념회와 대담을 하고 있다. 사진 유코리아뉴스 제공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다. 따라서 북한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회주의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사회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을 액면 그대로 실현한 국가가 아니다. 북한의 사회주의는 북한의 역사에서 제기된 도전에 응전하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해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 레닌의 소련 사회주의, 마오쩌둥의 중국 사회주의 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구성할 수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각자가 창출한 사회주의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1818년 태어나서 1883년에 사망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계몽주의를 배경으로 탄생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유럽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자본주의는 개인의 소유권을 요체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개인은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고,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개인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편입되면서 계급갈등이 심화되는 불평등 사회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생래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가 볼 때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야기하는 원천은 개인의 소유권이었다. 따라서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사유재산을 철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개인의 소유권을 집단소유권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또한 그는 집단소유가 이뤄지면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분배가 이뤄짐으로써 이른바 ‘분배의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는 필요에 의한 분배가 곧 정의로운 분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린 현실에서 사유재산 철폐를 통한 평등사회 실현은 자연스럽게 성취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그런 현실을 직시한 마르크스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생된 부르주아 계급과의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수적으로 우세한 프롤레타리아가 상대적으로 소수인 부르주아를 반드시 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프롤레타리아의 필연적 승리를 확신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 사유재산을 철폐할 수 있고, 사유재산을 철폐함으로써 계급이 부재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며, 계급이 부재하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부재한 사회,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이 평등한 유토피아 또한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대안인 사회주의가 세계적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가 엥겔스와 함께 저술한 <공산당선언>의 말미에서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역설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구상한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주의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그가 볼 때 종교란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인간은 이 세상 밖에서 존재하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었다. 이처럼 현세를 중시하는 마르크스가 볼 때 종교란 현세를 전도시킨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가 된다고 역설했다.

마르크스가 특히 종교 비판에 역점을 두었던 까닭은 그의 유물사관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유물사관이란 한마디로 경제결정론이다. 그는 사회의 하부구조를 구성하는 경제가 사회의 상부구조를 구성하는 정치, 법률, 인간의 의식 등을 결정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하부구조의 경제적 소유관계를 변혁시키면 상부구조 전체의 변혁 또한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데 종교는 인간의 의식을 마비시킴으로써 상부구조의 변혁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시키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게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회발전의 저해요소로 기능하는 종교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은 대부분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애초에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격렬한 투쟁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사회 계급투쟁 발생하지 않아

“중산층 등장…상호공생 관계 발전”

“기관총 출현 ‘다수민중 저항’ 제압”

레닌 ‘러시아혁명’ 전체주의로 변질

마오쩌둥 ‘인민·민족 사회주의’ 표방

유럽 사회에서 계급투쟁이 발생하지 않은 까닭은 한마디로 ‘중산층’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기술을 습득함으로써 이른바 산업역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부르주아는 그런 프롤레타리아를 쉽게 해고할 수 없었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부르주아에 집단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갖추기도 했다. 그러자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임금을 올려주면서 공장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전략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임금이 향상되자 중산층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소득의 여유가 생긴 중산층은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중산층이 시장에서 소비하는 상품은 부르주아가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이었다. 요컨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계급투쟁 대신 상호 공생하는 관계로 진화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기관총’의 등장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수적으로 우세한 프롤레타리아가 연대해서 부르주아와 싸운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예견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보급된 기관총은 마르크스의 예견을 빗나가게 했다. 기관총을 소유한 소수의 부르주아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쉽게 제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유럽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의 하나로 다중살상무기인 ‘기관총의 출현’을 꼽는다. 사진은 1911년 미국인 아이작 루이스가 개발한 최초의 완전자동식 기관총.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마르크스의 이론은 유럽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레닌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레닌은 먼저 마르크스의 이론을 러시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유럽에서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가난한 농민이 다수인 농촌 사회였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파생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투쟁이 있을 수 없었고, 그처럼 계급투쟁이 없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자 레닌은 국가가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적 소유권을 국가의 소유권(스테이트 오너십)으로 대체하는 혁신을 감행했다. 마르크스가 사적 소유권의 대안으로 제시한 집단소유권이 러시아의 농촌 현실에서 국가소유권으로 변용되었던 것이다. 레닌 자신은 국가의 수반으로 취임하면서 러시아 전체를 지배했다. 레닌이 문을 연 러시아의 전체주의는 스탈린에게 계승되면서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대신 국가소유권을 혁명의 주체로 내걸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의 수반이 되어 러시아 전체주의를 만들어냈다. 1919년 5월 레닌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혁명에 가담한 군인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는 마오쩌둥이 정착시켰다. 마오는 러시아에서 수입한 사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곧이곧대로 이식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러시아에서 수입한 사회주의와 중국의 지배적 현실 사이에서 드러난 커다란 간극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중국의 가난한 농촌의 현실에 주목했다. 그 시절 중국의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은 예컨대 펄 벅의 소설 <대지>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마오는 이른바 ‘100년 국치’, 즉 아편전쟁 이후 무려 100여년에 걸쳐 서구 열강에 유린된 중국의 역사 현실에 주목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국민군에 맞선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1949년 10월1일 베이징 천안문(톈안먼)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가 된 그는 ‘인민·민족’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제공

마오쩌둥은 중국의 역사적 유산에서 제기된 도전에 슬기롭게 응전하기 위해서 중국적 사회주의를 창안했다. 그는 ‘100년 국치’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해서 ‘2단계 혁명론’을 제시했다. 첫번째 단계는 외세를 축출하는 것이고, 두번째 단계는 중국 내부의 혁명을 단행하는 것이다. ‘2단계 혁명론’을 통해 실현되는 마오의 사회주의는 대단히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민족주의적 성격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인민’이라는 개념도 창안했다. 그는 중국 국적을 지닌 모든 사람들을 인민으로 정의했다. 따라서 자본가, 하층민, 농민, 소수민족 등등이 모두 인민에 속했다. 그가 중국의 국호를 ‘중화인민공화국’(PRC)으로 설정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에는 ‘100년 국치’의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고, 중국 내부의 정치혁명을 완수함으로써 인민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려는 마오의 강한 의지가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 시대 중국에는 가난한 농민들만 존재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마르크스가 예견한 계급투쟁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기대할 수 없었다. 계급투쟁의 주역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모두 성숙한 자본주의에서 파생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오는 소수의 지주들이 지배하는 농촌의 불평등 구조를 평등한 구조로 재편하고자 했다. 그래야만 빈곤에 허덕이는 대다수 농민의 삶을 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마오에게 사유재산 철폐를 통해서 평등의 이념을 실현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마오는 국가소유제를 선택한 레닌과 달리 인민이 주역이 되는 집단소유제를 선택했다. 중국 사회주의가 다양한 규모의 인민공사를 매개로 실현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인민공사는 두 단계를 거쳐 발전했다. 처음에는 약 250여 농가로 구성된 집단농장으로 출발했다. 이후 인민공사는 1958년 시작된 ‘대약진운동’을 계기로 도시지역까지 망라하는 대규모 공사(코뮌)로 확대되었다. 개별 공사는 보통 수천 가구로 구성되었다. 도시 노동자까지 가세한 공사는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는 주역이 되었다.

공사는 양두체제로 운영되었다. 두 지도자 중 한 명은 공사에서 선출했다. 그는 전문성을 갖춘 실력자였다. 또 한 명은 공산당에서 파견했다. 그는 확고한 당성(黨性)을 갖춘 인물이었다. 두 지도자 중 정치적 실권은 공산당에서 파견한 인물이 장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산당에서 파견한 인물이 모든 일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가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한다면 공사의 구성원은 자신들의 불만을 자신들이 선출한 리더를 매개로 공산당에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중국 사회주의는 인민 사회주의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공산당에서 파견한 지도자만 있었을 뿐, 인민이 선출한 지도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사회주의는 이런 사회주의의 이데알튀푸스를 참조하면서 자신들이 직면한 역사적 도전을 독자적으로 해결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정착되었다. 그 과정은 ‘길을 찾아서’ 다음 회에서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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