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4년 3월24일 대일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을 경찰이 최루탄과 진압봉으로 마구 때려 진압하고 있다. 사진 <합동연감> 자료
|
한 "청구권 표현" 일"경제협력 의미"
독도 논의, 제3자-국제사법재판소 이견 17일 공개된 6~7차 한일회담 관련 5건의 문서철 목록(A4 1200쪽)에는 협상 당시 주요 쟁점과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한일 양국 간에 오갔던 대화들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한일 협상 대표들은 청구권의 표현, 독도 영유권 문제 등을 놓고 첨예하게 맞섰다. 또 한국 정부는 협정 가조인을 앞두고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백지화했다는 쪽으로 언론을 움직이기 위한 홍보대책을 검토하기도 했다. ◇ 청구권이냐 경제협력이냐=한국은 협상 과정에서 청구권이라는 표현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협력 자금이라는 말로 표현할 것을 주장했다. 1965년 5월14일 일본 외무성에서 진행된 ‘청구권 및 경제협력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일본 쪽 니시야마 대표는 “우리 쪽의 제공은 어디까지나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며 “일종의 정치적인 협력이라는 의미에서 제공하는 것이며 일본의 일방적인 의무에 입각해 제공하는 것으로 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 쪽 김봉은 대표는 “(일본이) 전혀 의무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우리 일반 국민의 감정이 청구권을 받아들이는 생각으로 일관돼 있으므로 만일 청구권이라는 표현이 달라지면 중대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고 맞받았다. 한국은 1963년 1월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제23차 회의에서도 “일본 쪽이 제시한 협정 요강안의 제1의 ‘무상 경제협력으로서’라는 표현과 제2의 ‘유상 경제협력으로서’라는 표현은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일본은 회담 과정에서 나중에 개인보상 문제가 제기될 것을 우려해 구체적인 협의를 원했다. 그러나 오히려 한국이 ‘협정에는 개인청구권도 포함돼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개인관계 청구권이 소멸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점도 확인됐다. 1965년 4월16일 이규성 주일공사와 사토 세이지 일본 외무성 조약국 참사관의 면담 대화록을 보면, 당시 사토 참사관은 “청구권 문제는 법적 문제가 많아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이동원시이나 (외무장관간) 합의에 의해 개인관계 청구권은 소멸됐으며 앞으로 양국이 각각 국내적으로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는다”고 말했다. ◇ 독도 영유권은 제3자의 판단에=한일 양국은 1962년 말부터 시작된 제6차 한일회담 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에서 독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팽팽히 맞섰다. 1962년 9월3일 제6차 한일회담 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 회의에서 일본 이세키 국장은 “독도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독도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은 같은해 12월21일 열린 20차 회의에서 “독도는 원래 한국 영토임이 분명하고 한일회담 현안도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한국은 이어 “일본이 국내 정치를 이유로 (독도 문제) 해결 없이는 회담 타결이 어렵다고 주장해 국교 정상화를 위한 대국적 견지에서 지난번에 김종필 정보부장이 제3국에 의한 조정안을 언급했던 것”이라고 밝혔으나, 일본은 같은달 26일 예비교섭에서 “국교정상화 후 예컨대 1년간 쌍방이 합의하는 조정기관에 의한 조정에 회부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국제사법재판소에 부탁하자”고 주장하며 맞선 내용이 확인됐다. ◇ 김종필오히라 메모 백지화를 홍보하라=한일협정 가조인을 앞두고 한국 외무부와 주일대표부, 국무총리와 외무장관 사이에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두고 전보들이 숨가쁘게 오갔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3월29일 오전 10시16분 장관 비서관 명의의 전보가 외무부 공보관 앞으로 긴급 타전된다. 전보에는 “30일 가조인될 것으로 예상되는 청구권 문제에 있어서 3. 2. 1항이 변경되는 경우 각 언론사 데스크와 접촉해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실상 백지화’라는 표제로 대대적인 피알(홍보)을 하시기 바람”이라는 주문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주문은 무위에 그친다. 이튿날인 3월30일 오전 9시55분 외무차관이 도쿄에 있는 이동원 외무장관에게 관련 사항을 보고하는 내용의 전보를 띄웠다. 전보는 고위층의 회의 결과라며 “현 단계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실상 백지화’라고 크게 피알할 경우에는 국내외에 불필요한 파문 및 오해를 야기시킬 염려가 있으니 1억불 이상을 3억불 이상으로 구체화하여 청구권 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였다는 식으로 피알함이 좋겠다”고 밝혔다. 6월12일 오후 7시에는 외무부에서 이동원 외무장관에게 또다른 전보가 전달된다. 전보에는 “자금의 명목에서 무상 경제협력의 경제협력은 반드시 삭제되어야 하며, 기타 부분에서 그와 같은 표현도 삭제되어야 할 것임. 일본 쪽 기본협정 전문 중 제2단 ‘한국의 경제사회 발전에 기여’ 운운하는 표현은 곤란하다고 생각됨”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이 집요하게 주장한 경제협력이라는 표현을 막기 위해 정부가 다급하게 움직였음을 보여준다. 한일협정이 타결되기 10일 전이었다. 유강문 기자 moon@hani.co.kr
협정체결 어떻게
망언·시위로 13년4개월 자유당 정권 시절인 1952년 2월 시작된 한-일 회담은 민주당 정권을 거쳐 13년 4개월뒤인 65년 6월 공화당 정권에서 마무리됐다. 애초 한국은 51년 8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서명국(태평양 전쟁 승전국) 자격을 얻어 대일 전쟁 배상 요구가 가능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 52년 2월14일 제1차 한-일 회담이 열렸으나 분위기는 차가웠다. 1차 회담에서 한국은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항’을 제시했지만 일본은 ‘우리도 받을게 있다’며 한국에 남아있는 일본인 재산청구권을 주장하는 맞불 작전을 폈다. 삐걱거리던 협상은 53년 10월 3차회담에서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의 망언으로 깨졌다. 구보타는 “일본은 조선에서 36년간 철도를 만들고 항만을 건설하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 주장했다. 구보타 망언으로 한일회담은 5년 동안 중단됐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한-미-일 동맹 강화를 염두에 두고 61년 10월 제6차 한-일 회담을 시작했다. 61년 11월22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도쿄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회담해 조속한 시일 안에 국교정상화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청구권 금액을 두고 다투던 양쪽은 62년 10월20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을 만나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에 합의했다.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완용이 되겠다”고 호언했던 김종필씨가 개별 청구권을 포기하는 ‘정치적 타결’을 한 것이다. 6차회담은 굴욕 회담 중단을 중단을 요구하는 국내 시위 격화(64년 6·3사태)로 또다시 멈췄다. 비상계엄으로 반대시위를 진압한 박정희 정권은 64년 12월 3일 7차 회담을 개최했다. 시이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이 65년 2월 서울에서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가조인함으로써 고비를 넘긴 한-일 회담은 65년 6월22일 당시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외상이 도쿄 일본총리 관저에서 ‘한일협정’에 서명해 종지부를 찍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김-오히라 메모'장본인 JP
"아무런 할 말이 없다"
|
||||||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의 장본인으로 한일협정 체결의 한국 쪽 주역으로 활약했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17일 정부의 관련 문서 공개에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김 전 총재는 재일동포 신년하례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7일 일본으로 출국한 뒤, 17일까지 일본에 머물고 있다. 김 전 총재의 측근인 유운영 전 자민련 대변인은 “한일협정 문제에 대한 김 전 총재의 입장은 여전히 ‘노 코멘트’”라며 “김 전 총재의 귀국이 원래 일정보다 늦어지고 있지만 문서 공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전 총재는 최근에도 국내와 일본의 언론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으나 “아무런 할 말이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고 유 전 대변인이 전했다. 김 전 총재는 17대 총선에서 자민련 비례대표로 입후보했다가 낙선한 직후인 지난해 4월19일 탈당해 현재 자민련과 공식적인 관련을 맺지 않고 있다. 김 전 총재는 1962년 11월12일 중앙정보부장 자격으로 오히라 마사요시 당시 일본 외상과 회담해 ‘김-오히라 메모’를 교환했고, 이에 앞서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이케다 당시 일본 수상에게 전달하는 등 한일협정 추진의 주역이었다. 그는 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격화되자 공화당 의장직을 사퇴했다. 김 전 총재는 그 뒤 40년이 지나도록 당시 상황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적인 술자리 모임에서도 한일협정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할 얘기가 없다”며 입을 다물곤 했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일협정 관련 등을 이유로 시민단체의 ‘공천반대 인사’ 명단에 포함됐을 때도, 그는 측근들을 통해 “일체 무반응이라고 해라.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라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