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26 19:12
수정 : 2005.08.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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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 직원들이 한-일 협정 문서를 정리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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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살 드러난 한·일 협정
김종필 “6억달러” 오히라 “3억달러” 청구액 일전
“일본도 한국에 보상 받아야 한다” 구보타 망언도
회담 막힐 때마다 양국 미국 눈치봐
26일 공개된 한-일 협정 문서는 14년 동안 진행된 회담의 우여곡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과 일본은 청구권 총액과 명목, 독도 영유권을 놓고 막판까지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회담이 고비를 맞거나 교착에 빠지면 미국이 슬그머니 나서 훈수를 뒀다.
한-일 협정 당시 일본의 보상금 규모를 결정한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26일 공개됐다.
김종필- 오하라 메모=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직접 쓴 이 메모에는 ‘1급 비밀’이라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원고지 2매 분량이다.
메모는 일본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을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규정했지만, 자금의 명목에 대해선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양쪽이 각각 제시한 금액도 적혀 있다. 유상 자금의 경우 한국은 2억5천만달러, 일본은 1억달러를 각각 제시했고, “이것을 양자가 2억달러로 양 수뇌에게 건의한다”고 돼 있다.
메모는 김 부장의 제안에 따라 작성됐다. 당시 김 부장은 오히라 외상과 두 차례 단독회담을 통해 한-일 회담의 최대 분수령이었던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으며, “단독회담 뒤 생길 수 있는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를 남기자”고 제안했다.
구보타 메모=“일본도 (한국 쪽에)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 동안 벌거숭이산을 푸르게 바꾸었다든가, 철도 건설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26일 공개된 한일회담 외교문서에 실린 ‘구보타 망언’이다.
1953년 10월15일 제3차 한-일회담 때 일본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가 했던 이 망언으로 회담이 4년 동안 좌초됐다.
구보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보타는 한국 쪽 홍진기 수석대표가 “우리는 법률적 청구권만을 요구한 것”이라며 일본쪽의 ‘역 청구권’ 주장을 철회하라고 요구하자 이런 망언을 했다.
한국 대표단은 같은 달 20~21일 본회의에서 공식 해명을 거듭 요구했지만 구보타는 끝까지 버텼고, 회담은 결렬됐다. 일본은 57년 12월에야 ‘구보타 망언’과 ‘역 청구권’ 주장을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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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정-베트남전 문서공개-한일협정 체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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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폭파론=일본은 회담 내내 독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은 1953년 4월부터 열린 2차 회담 어업분과위원회에서 독도는 일본땅이고, 따라서 이를 포함한 한국의 평화선은 불법 획정이라며 포문을 열었다. 일본의 야심은 1962년 2월22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회담한 고사카 젠타로 외상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제안하면서 구체화한다.
일본은 1962년 9월3일 이른바 ‘독도 폭파론’을 제기한다. 이날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한-일 예비절충 4차 회의에서 이세키 유지로 국장은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라며 “크기가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해 한국의 반발을 부른다. 이 발언은 같은해 11월13일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김 부장이 기자들에게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독도 폭파론’의 시원을 둘러싼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한국은 이에 제3국 조정론을 거론하며 일본의 예봉을 피했다. 김 부장은 오히라 외상과 회담에서 “독도 문제를 제3국 조정에 맡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이에 오히라 외상은 “생각해볼만한 안”이라며 제3국으로 미국을 지목한다.
미국도 참가자=미국은 사실상 한-일 회담의 보이지 않는 참가자였다. 일본이 고집하던 ‘역 청구권’을 철회하는 데는 미국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한국과 일본은 회담이 막힐 때마다 미국의 눈치를 살폈다.
미국의 역할은 1963년 7월 김동조 외무장관의 미국 방문 때 사용하려 했던 외교문서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문서엔 “한국민 일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의 한·미·일 3국 관계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며 “미국이 한국에서 부담하고 있는 군사·경제적 원조 기능을 일본에 넘기는 것을 한국민은 원하지 않고 있다”고 적혀 있다.
한-일 협정 성사가 채 1년도 남지 않은 1964년 7월께는 회담 타결을 안달하는 미국의 조급한 태도도 엿보인다.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는 “회담의 조기타결이 어려울 경우에는 주한 일본대표부 설치를 허락해 사실상 수교관계를 긴밀화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한국에 보낸다. 유강문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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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체결까지
13년 8개월 마라톤 협상 ‘정치 결탁’ 마침표
52년부터 7차례 접촉→ 10년뒤 김-오하라 메모 급물살→ 64년 일총리 관저서 서명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은 그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핵심 축을 이룬다. 난항에 난항을 거듭한 회담이 19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대표되는 정치적 결탁으로 합의를 모색하자, 야당·학생 등의 거센 반발로 비상계엄까지 선포하는 ‘6·3 사태’ 등 정치적 격변을 불렀다. 또 베트남전 수행 과정에서도 보여지듯 미국 주도의 냉전형 한·미·일 3각 협력관계 구축의 정치·경제적 토대도 만들어냈다.
한-일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은 전후 세계 외교사를 봐도 가장 길었던 외교협상 가운데 하나다. 한국과 일본은 일제강점 등 과거 문제를 해결하고 두 나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1952년 2월15일 시작된 1차 회담 이후 무려 13년 8개월간에 걸쳐 모두 7차례의 협상을 벌였다.
협상은 식민지 지배의 과거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선린우호관계를 맺는데 대한 법적인 내용을 담은 기본관계 조약을 중심으로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52년에서 53년까지의 1, 2, 3차 회담은 초기 단계로 볼 수 있다. 한-일간의 심한 감정 대립으로 5년 남짓 회담이 중단됐다가 재개된 58년의 4차부터 64년의 6차까지는 회담은 열렸지만 교섭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거나 미미했던 시기다. 마지막 3단계는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가 마침내 서명에 이른 7차 회담이다.
1964년 12월3일에 시작한 7차회담은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이 65년 2월17일부터 나흘 동안 방한해, 서울에서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임시 조인하면서 타결 국면에 들어간다. 그 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65년 6월22일 당시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이나 일본 외상이 도쿄의 일본총리 관저에서 기본관계 조약과 부속 4개협정에 서명하는 것으로 긴긴 협상의 막을 내렸다.
한-일 협정 서명 이후 한국에서는 야당의 보이콧 속에 같은 해 8월14일 찬성 100표, 기권 1표 등으로 국회 비준을 완료했으며, 일본은 11월과 12월 중의원과 참의원 비준을 각각 마쳤다.
과거사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힌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의 담화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30년 뒤인 1995년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한-일 관계는 시마네현의 독도조례 통과와, 교과서 역사왜곡 등에 발목잡혀 있다. 한-일 협정에서 올바른 과거청산이 없었던 탓이다.
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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